[촘말로 몰랐던 제주불교] 제주 불교 순례 12월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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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말로 몰랐던 제주불교] 제주 불교 순례 12월력도
  • 고창영
  • 승인 2023.02.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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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절이다. 수행의 기나긴 여정 위에 있는 절은 길이다. 그 절길을 걸어 운동화 한 켤레 버릴 즈음이면 문득 지금까지 걸어온 그 길이 곧 두타의 길과 다름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모든 집착을 버리고 최소한의 도구로 살아가면서 맑은 마음으로 회귀하는 12두타행. 그 두타의 정신을 되새기며 새롭게 걷는 순례의 길에 진리의 달이 벗처럼 마중을 나온다. 마치 달이 운행하듯 인연의 궤도를 따라 제주의 절길을 걷는 ‘제주 불교 순례 12월력도(十二月歷道)’는 제주지역 사찰을 12개 지역으로 나눠 12두타행의 길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1월도는 재아란야처(在阿蘭若處)의 길이다. 이 길은 번잡한 도시를 떠나 고요한 숲길을 걸으며 마음을 쉬는 수행의 길로 20.4km, 5시간 15분, 5개의 사찰을 순례한다. 구품연지의 세계를 구현해 놓은 하원 법화사에서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의 주역인 방동화 스님이 창건한 원만사를 거쳐, 법정악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를 둘러보고 영실 수로길로 접어든다. 한라산의 맑은 기운이 응향(凝香)이 되어 감싸는 영실의 깊고 그윽한 숲을 걸어 나오면 길은 존자암 그리고 오백나한사로 이어진다. 존자암은 제주 불교 초전 법륜지로 알려진 곳으로 세존사리탑이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한라산 영실 오백나한사는 영실 수행 터에 조계종 종정 고암 대종사께서 안거하신 인연으로 현재에 이르게 된 사찰이다. 이곳의 오백나한전은 서귀포시 향토유형유산 제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2월도는 상행걸식(常行乞食)의 길이다. 이 길은 음식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바람보다 가볍게 걷는 수행의 길로 12.8km, 3시간 45분을 걸으며 8개의 사찰을 순례한다. 제주 성안을 지켜주는 복신미륵 서자복 해륜사에서 용연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걷다 보면 산지천을 지나 건입동 복신미륵 동자복을 만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미륵불로 추정되는 서자복과 동자복은 제주시의 서쪽과 동쪽에서 서로 마주 보며 성안을 지켜준다. 성 밖으로 나오면 사라봉과 별도봉을 따라 사라사, 보림사, 원명선원 등에 참배할 수 있고 보덕사를 거쳐 삼양 원당사지로 접어들게 된다. 삼첩칠봉(三疊七峯) 원당봉에 의지한 원당사, 불탑사, 문강사 등은 원나라 기황후가 아들을 얻기 위해 세웠던 원당사지에 인연하여 일어난 사찰들이다. 불탑사 5층 석탑은 보물 제118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3월도는 차제걸식(次第乞食)의 길이다. 이 길은 차별 없이 음식을 나누며 상대에 대한 분별을 내려놓고 걷는 수행의 길로 15.6km, 4시간 5분, 5개의 사찰을 순례한다. 아라동 남국사에서 구암굴사까지 걸어간 후에 그곳에서 근대 제주 불교 선지식들이 걸었던 관음사 옛길로 접어든다. 한라산 관음사는 근대 제주 불교의 중흥을 이끌었던 곳으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3교구 본사다. 관음사에서 한라의 산길을 따라 아흔아홉골 천왕사에 참배하고 석굴암까지 걸으면 배낭에는 숲의 향기가 가득하게 된다. 예로부터 수행승들이 머물던 곳으로 알려진 천왕사와 석굴암 일대에는 수려한 풍경이 계곡마다 굽이굽이 펼쳐져 있다. 

 

4월도는 수일식법(受一食法)의 길이다. 이 길은 한 자리에서 거듭 먹지 않음으로써 안일한 자신을 경계하는 수행의 길로 18.23km, 4시간 50분, 8개의 사찰을 순례한다. 오석 미륵불이 지키는 화천사에서 월평의 자비정사, 삼광사를 지나 영평의 한마음선원, 연화사에 참배하고 구남동 보덕사와 독짓골 제석사를 지나 관음사 포교당인 보현사로 이어지는 길이다. 회천동 화천사는 조선 연산군 당시 제주목사의 명으로 소각당하여 폐사됐으나 마을 사람들이 석불암을 창건해 숭배하여 온 곳이다. 화천사에는 자연석으로 조성된 산신, 용신과 5개의 미륵불을 모신 석불단이 있어서, 이곳에서 매월 정월마다 마을제가 행해진다. 영평동 연화사 근처의 수수못은 호종단이 제주의 혈을 끊으러 왔을 때, 수수못의 신이 ‘꼬부랑나무 아래 행기물’로 변신하여 물의 혈을 지킨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길은 다시 보덕사, 제석사를 지나고 근대 제주 불교 역사를 간직한 보현사로 이어진다. 

 

5월도는 절량식(節量食)의 길이다. 이 길은 하나의 발우 안에 있는 음식으로 만족하며, 탐욕에 찌든 자신을 내려놓는 수행의 길로 15.3km, 4시간 7분, 9개의 사찰을 순례한다. 부처물 월영사에서 우리절, 혜능사, 고대사찰 향림사, 법장사, 백제사, 무주선원을 거쳐 극락사와 대원정사로 이어지는 길이다. 부처물 월영사 인근에는 아주 오래된 절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절이 무너지면서 주지 스님의 세숫대야가 부처물에 묻히게 됐고, 그 이후로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부처물에서 대야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전해진다. 부처물 근처에는 불상도 세워져 있었으나 제주 4·3 때 사라지고 말았다. 월영사 소장 목조여래좌상은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 보호되어 있다. 

 

6월도는 중후부득음장(中後不得飮漿)의 길이다. 이 길은 지나친 식탐을 경계하여 조금 먹고 함께 나누는 수행의 길로 12km, 3시간 8분, 7개의 사찰을 순례한다. 신선이 내려온 곳이라 전해지는 애월읍 납읍리 금산공원 자락의 ‘강선이 빌레’에 자리한 월인사에서 고광사, 선운정사, 반야사, 황룡사를 거쳐 월계사, 옹포포교당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월계사와 옹포포교당이 들어선 지역 일대에서는 고대사찰과 관련한 ‘불건터’, ‘중밭’, ‘배중밭’, ‘돌탑’ 등의 지명도 찾아볼 수 있다. 월계사는 근대에 들어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는 먹지 않는다’는 일일불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의 선농일치 삶을 살았던 이세진 스님이 머물던 곳이고, 옹포포교당은 일붕선교종의 본산이다. 

 

7월도는 착폐납의(着弊衲衣)의 길이다. 이 길은 검소한 옷을 입고 생활하며 늘 자신을 낮추는 수행의 길로 15.06km, 3시간 45분, 7개의 사찰을 순례한다. 대정 일과리 고대사찰 터인 대원사에서 서산사를 거쳐, 단산의 단산사와 산방산의 보문사, 산방사, 산방굴사, 영산암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서산사는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에서 선봉대장으로 활동했던 강창규 스님이 창건한 사찰인데, 스님은 일제강점기 친일 세력에 영합하지 않고 끝까지 소신을 지키다가 마침내 서산사 앞 바닷가에서 좌탈입망(坐脫立亡)에 들었다. 서산사 소장 목조보살좌상은 강창규 스님이 모시고 있던 불상으로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그리고 단산과 산방산 일대의 사찰들은 고려시대 혜일선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와 초의 의순선사는 물론, 제주목사와 관리, 시인과 묵객 등에 이르기까지 숱한 이들이 찾아와 그 경승(景勝)을 찬탄하던 곳이다. 

 

8월도는 단삼의(但三衣)의 길이다. 이 길은 많은 옷을 쌓아두지 않고 이웃과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수행의 길로 22.95km, 6시간, 8개의 사찰을 순례한다. 중문 천제연 폭포의 풍경 속에 있는 광명사와 천제사에 참배하고, 약천사, 봉림사, 무량정사를 거쳐 정방사, 법륜사, 혜관정사까지 걷는 길이다. 중문 광명사와 천제사는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방동화 스님과 그 인연들이 정법을 이어가는 곳이다. 정방사는 원래 서귀포시 상효동 선돌 인근의 고대 사찰 두타사 터에 창건됐던 쌍계사가 옮겨온 곳인데, 정방사 석조여래좌상은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보목리의 혜관정사는 계몽운동가 원문상 스님의 속가 동생인 원혜관 스님이 창건한 법화종 사찰이다. 

 

9월도는 총간주(塚間住)의 길이다. 이 길은 무상관을 통해 탐욕을 내려놓는 수행의 길로 10.55km, 3시간, 6개의 사찰을 순례한다. 효돈천 상류 남서교 인근의 효명사에서 조계종 종정 고암 대선사의 뜻이 서린 선덕사를 거쳐 선돌선원, 용주사, 법성사, 남국선원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효명사, 선덕사, 선돌선원 일대는 임제(林悌, 1549~1587)의 『남명소승』에 기록된 고대 사찰 두타사와 관련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0월도는 수하지(樹下止)의 길이다. 이 길은 나무 밑에 머물며 머무는 곳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수행의 길로 12.8km, 3시간 20분, 5개의 사찰을 순례한다. 신효의 월라사에서 백련사, 용운사를 거쳐 망장포 해변의 불광사에 참배하고 남원의 선광사로 이어지는 길이다. 월라사는 제주 4·3사건 당시 파옥됐다가 재건된 사찰인데, 월라사 인근의 심우대는 고대에 수행자가 머물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남원의 선광사는 제주 4·3사건 당시 토벌대에 의해 파옥됐다가 재건된 사찰이다. 선광사에서는 제주도 사찰 중에서 최초로 모셔진 사천왕상을 찾아볼 수 있으며, 불경전적류가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11월도는 노지좌(露地坐)의 길이다. 이 길은 앉은 곳마다 번뇌의 하늘이 트이길 염원하는 수행의 길로 15km, 4시간, 5개의 사찰을 순례한다. 성산일출봉이 바라다보이는 동암사에서 대원정사, 금붕사, 용문사를 거쳐 평대의 성림사까지 걷는다. 성산과 종달의 해안도로를 따라 하도리와 세화를 거쳐 평대로 이어지는 해변의 길이다. 금붕사는 제주 4·3 사건 당시 목동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이성봉 스님이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하고, 사찰이 전소됐다가 재건됐다. 당시의 금붕사 <오백나한도>가 보전되어 있다. 

 

12월도는 단좌불와(但坐不臥)의 길이다. 이 길은 눕지 않고 앉아서 정진하듯이 게으름을 버리고 수행하는 길로 13.97km, 3시간 45분, 7개의 사찰을 순례한다. 김녕 금용사에서 백련사, 함덕의 정토사, 덕림사를 거쳐 조천의 양진사, 고관사, 불사리탑사에 이르는 길이다. 김녕 백련사는 김녕포구에 자리 잡고 있는데 항일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김석윤 스님을 비롯한 근대의 선지식들이 머물던 곳이다. 백련사 대웅전에는 17세기에 조성된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함덕 해안에서 정토사를 거쳐 덕림사로 가는 길에는 고대 사찰 강림사지로 추정되는 폐사지가 있어서 함께 살펴볼 수도 있다. 조천으로 들어서면 조천포구의 고대 사찰 관음사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양진사는 물론 고관사와 불사리탑사도 함께 참배할 수 있다. 고관사는 『탐라지』에 기록된 고대 사찰 조천 관음사의 명맥을 잇는 사찰로서, 제주 4·3 당시 사찰의 기능을 상실했다가 재건됐다. 고관사 대웅보전에는 목조 아미타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여래좌상의 복장에서 사리가 발견되면서 그 인연으로 불사리탑사가 창건됐다. 

 

고창영
학교에서 40여 년간 역사, 사회를 가르쳤으며, 제주 불교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조사·기록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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