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말로 몰랐던 제주불교] 기억해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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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말로 몰랐던 제주불교] 기억해 4·3!
  • 한금실
  • 승인 2023.02.2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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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과 제주 불교
4·3의 상징인 동백꽃. 붉은 동백꽃은 땅으로 스러져간 영혼을 의미한다. 

피로 물든 외꼴절

아름다운 해안가 마을 함덕은 제주에서도 유명한, ‘인싸’들의 핫플레이스다. 드넓은 모래사장을 배경으로 다양한 맛집과 자유로운 영혼들의 버스킹과 패러글라이딩 등 다채로운 관광상품들이 타지의 여행객을 끊임없이 끌어모으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과거로 돌아가 우리 부모님들의 유년 시절쯤 되던 시기로 가보면, 멸치잡이와 같은 어업에 종사하는 것 외에는 먹고살기가 썩 좋은 곳이 아니었다. 이유는 가늘고 하얗게 흩어지는 모래의 분포가 해안에서부터 마을 위 언덕 너머까지 넓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름진 토양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을의 농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이었다.

1930년경, 함덕 외꼴절에서 주지를 맡고 있던 신홍연 스님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파, 시금치, 무, 호배추 등과 같은 다양한 품종의 씨앗을 들여와 마을에 보급했다. 스님은 직접 새로운 농사법을 교육시키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밭을 일구고 농작물을 수확해 마을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스님은 주민들에게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 됐고, 외꼴절 역시 초등학교 소풍 장소로 이용되는 등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됐다.

그후 희망이 가득 찼던 해방의 기쁨도 잠시, 1948년 4·3사건이 일어났다. 함덕마을을 비롯해 인근 조천면 일대에서는 연일 토벌대의 무차별 학살이 자행됐다. 생사의 기로에 놓인 주민들은 하나둘씩 산으로 떠났고 가을 무렵부터는 대규모 입산 행렬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행렬 속에는 외꼴절 신도들도 있었다. 일부 신도들은 무장대에 가담하기도 했다. 

외꼴절에서는 낮에는 군인이, 밤에는 무장대가 찾아오는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신홍연 스님은 이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밤에 몰래 왔다 갈 배고픈 무장대를 위해 솥마다 밥을 가득 준비해 놓았다. 밥을 하던 중에 혹 경찰이 오는 기척이 들리면 짚으로 솥을 덮어 감추고 스님은 변소 속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위태로웠지만 그래도 사람에 대한 온정이 남아 있어 숨을 쉴 수 있었던 그때, 1948년 11월 중순 갑자기 도량이 소란스러웠다. 토벌대에 쫓겨온 무장대원들이 살려달라며 외꼴절로 피신온 것이었다. 스님은 이번도 외면하지 못하고 법당 내에 있는 좁은 공간에 이들을 숨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들이닥친 토벌대가 사찰 경내를 쥐 잡듯 샅샅이 뒤졌고 결국 무장대원들은 발각되고 말았다. 

토벌대는 신홍연 스님을 외꼴절에서 200m 떨어진 밭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몇 그루의 아름드리 큰 댕유자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에 스님을 묶고는 뒤따라온 마을 민보단원들에게 총을 쥐여주며 죽이라고 명령했다. 토벌대의 명령을 어긴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민보단원들도 역시 언제든 토벌대의 살육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방아쇠가 당겨지고 이어 날카로운 총성이 일제히 하늘을 꿰뚫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총알이 스님의 몸을 비켜나갔다. 신홍연 스님은 삼매에 드신 듯 미동조차 없으셨다. 토벌대는 민보단원들을 더욱 거칠게 몰아세우며 재차 사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후에도 계속 총알은 스님을 비껴갔다. 민보단원들이 차마 스님을 쏘지 못하고 모두 다른 곳을 향해 총을 발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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