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설었다. 서울에서 멀리 있는 부산은 숱하게 찾으며 머무르곤 해서 익숙했지만, 정작 부산보다 가까운 대구에는 이틀 이상을 머물러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낯선 대구에 들러 먼저 간 곳이 팔공산이다. 초행이었다. 접근이 쉬운 하늘 정원에 올라 팔공산 산세를 어림잡았고, 낯선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아니 그들이 먼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사진 많이 찍었능교?”라는 인사를 한 시간에 한 번꼴로 들었다. 가산바위에서 만난 한 무리의 보살님들은 “우리 사진 좀 찍어주소. 역시 작가님이네, 억수로 잘 나왔네”라며 말을 건넸다. 파계사로 왔다. 주지 스님은 “한 달이라도 좋아요. 마음 편하게 들고 나면서 편하게 머무르세요”라며 예전 당신이 쓰던 방을 내주었다. 팔공산 만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열 분의 스님이 동안거 결제 중인 성전암에 들러 현응선원장 벽담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2007년 성전암 화재 뒤부터 머물며 지금과 같은 도량을 일궈왔다. 그동안 한 번도 자리를 비운 적 없이 목탁을 치며 탁발했다. 말이 느리고 목소리가 작아 기도와는 거리가 먼 수좌 스님이라 생각했었는데, 사시 예불 때 관음전에서 들려오는 염불 소리는 큰 절에서 기도하는 스님 못지않게 구성지고 우렁차다. 풍수로 그 좋다는 닭이 알을 품는 형국의 성전암이라지만 한편으로 관음도량인 것도 같다고 귀띔한다. 사시 예불 때 관음전에는 예를 올리는 보살님들이 빼곡하다. ‘몸 받았을 때 공부해야 한다’고 하는 스님의 말이 진하게 울린다.
대비암 동쪽 기슭에 있는 영조 대왕과 인연이 깊은 현응대사의 승탑을 만났다. 현재의 파계사 터는 현응대사에서 비롯한다. 4기 중 오직 1기의 승탑만이 현응대사의 것으로 생각했던 예상을 주지 스님이 바로 잡아줬다. 그동안 변변한 해석이 없었던 것을 스님이 얼마 전 전문가에게 의뢰해 해석을 얻었다는 것이다. “선사의 휘는 영원이며 어려서 출가했다. 스무 살에 눈에서 사리가 나왔으나 분실했고, 세수 육십에 원적에 들어 사리 3좌를 수습해 승탑 3기에 안치했다. 또 1좌는 일찍이 스님이 출가 백일이 되는 때에 백의관음보살에게 천도재를 지낼 때 얻은 것이다”가 비 뒷면의 내용이다.
원통전에서 조선 21대 왕이 되기 전의 연잉군을 만났다. 파계사는 현응대사와 영조의 인연으로 왕실 원당이 됐고, 그 내용이 고스란히 원통전에 담겼다. 후불탱인 <영산회상도>에는 연잉군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이 발원자로 기록돼 있다. 그림이 그려진 1706년은 1701년 장희빈이 죽고 난 뒤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한 시기였다. 어쩌면 대군을 세상에 나게 했던 인연이 또 한 번 힘을 발휘해 대군을 세상에 우뚝 서게 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런 때를 대비해 왕실이 원당을 후원하며 지켜주는 것일 테니까. 파계사 수미단의 2단에 새들이 있는 게 육지 동물이 있는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과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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