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팔공산] 파계사 주지 허주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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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 팔공산] 파계사 주지 허주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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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1.3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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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물이넘치듯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파계사 주지 허주 스님

허주 스님은 파계사와 1973년 인연을 맺어, 성우 스님(현 불교TV 회장)을 은사로 다음 해 출가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50년이다. 스님 출가에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스님이 살던 경기도 안양의 한 마을에서 2~3년 사이로 어린 학생 7명이 파계사로 출가했다. 대다수가 청소년티를 벗어나지 않은 나이였다.

“한 가족도 30년 살면 서로 흩어지는데, 50년을 한 문중으로 살았어요. 한 마을 7명이 파계사로 출가해, 한 분 입멸(入滅)하고 나머지 6명이 큰집, 작은집하며 살고 있죠.” 

얼마 전 대구 ‘앞산’에 있는 은적사에서 주지 소임을 마치고 이생에 ‘주지 소임’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출가한 지 50년 다 돼서 파계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됐다고. “소임을 살아야만 하는 시절 인연이었다” 한다.

파계사는 고송(古松) 스님이라는 큰 숲 아래에서 ‘화합’을 이루며 살고 있다. 조실 도원 스님(원로회의 의장 역임), 회주 성우 스님(현 원로회의 수석부의장)을 필두로 100여 명의 문중 스님이 있다.

“어른 스님들이 예전부터 이것저것 말씀하셨는데, 저는 조금 멋대로 살았죠. 법랍이 되니,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기 힘듭디다. 허허”하며 사연을 은연중 내비친다. 

 

4명의 임금

파계사는 조선시대 영조 임금과 관련이 깊다. 숙종이 영원(靈源) 스님에게 기도를 당부해 잉태한 임금이 영조다. 어느 날 숙종의 꿈에 스님이 대궐로 들어오더니 이내 보이지 않더니, 3일 뒤에는 상서로운 빛이 궐을 비췄다. 빛을 좇아 보니 영원 스님이 있었다. 세자를 보지 못하고 있던 숙종은 기도를 부탁했고, 얼마 후 왕후가 임신했다.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영조 임금이다. 숙종은 영원 스님에게 ‘현응(玄應)’이라는 호를 내렸다. 원통전과 관음보살, 하마비, 영조 나무 등 유물과 설화가 남아 있다. 절집에 왕의 위패를 모시는 곳은 흔치 않다. 파계사 기영각(祈永閣)이 그 공간이다.

“조실 스님께 여쭈니,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기영각 안에 선조, 숙종, 영조 임금의 위패와 가마가 있었다고 해요. 2020년부터 해체 보수공사를 했는데, 단청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었어요. 왕실 단청이죠. 그것만으로도 왕실과 파계사 인연을 알 수 있죠. 개산조 스님하고 세 분의 임금 위패를 다시 모셨습니다.”

원통전에 모셔진 관음보살 복장 유물로 영조 임금의 어의(御衣)와 발원문, 또 세종 임금의 중수문이 나왔다. 그렇기에 관음보살님을 모신 것은 조선 초기까지 올라간다. 이렇게 관음보살상에는 세종, 숙종, 영조 임금 3명의 자취가 있다. 그렇다면 선조의 위패는 기영각에 왜 모셨을까?

“원통전은 임진왜란 직후, 선조 임금 시절에 계관(戒寬) 스님이 중수하셨죠. 자세히 살펴보면, 기둥 주춧돌에 화마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전쟁 직후임에도 원통전 복원을 지시한 거죠. 왕실에서 명했기에, 불에 탄 주춧돌을 교체할 시간도 없이 급히 건물을 올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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