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팔공산] 은해사 암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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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 팔공산] 은해사 암자길
  • 우봉규
  • 승인 2022.11.3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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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흔적을 찾아서
은해사 전경. 팔공산 동쪽 자락에 있다.

 

 

은해사는 팔공산 동쪽 자락 영천에 위치한다. 809년(헌덕왕 1)에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고 했다. 몇 번에 걸친 소실과 중수를 거쳐, 1546년(명종 1)에 천교화상(天敎和尙)이 지금의 터로 옮겼다. 법당을 중수한 후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銀海寺)라 했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극락보전에 대웅전 편액이 있었으나 근래에 변경했다.

은해사에는 천 년이 넘는 거조암을 비롯해 백흥암, 운부암, 백련암, 묘봉암, 중암암, 기기암, 서운암 8개의 암자가 있다. 갓바위 부처님이 계신 선본사 역시 은해사 말사다. 은해사와 백흥암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佛光(불광), 銀海寺(은해사), 大雄殿(대웅전), 寶華樓(보화루), 一爐香閣(일로향각), 十笏方丈(시홀방장) 편액과 주련(柱聯)이 있다. (편집자 주)

익으면 떨어지는 것이 어디 지금의 붉은 감뿐이랴.

그야말로 무르익은 것들이 하나둘 떨어지는 절기, 집 없는 가여운 중생들도 이제 꼭 집을 찾아야만 하는 시간, 일 년 만에 은해사를 찾는다. 그러나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조실 법타 스님을 만나러 갔지만 까닭이 다르다. 그동안 게을러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팔공산과 은해사의 산내암자 운부암과 백흥암을 간다. 마치 기적처럼, 둥둥 꼭 작년의 그 날처럼 일찍 떨어진 노란 은행잎이 가을바람에 휘날린다. 기후변화가 있다지만 어찌하여 우리의 절기는 이토록 어김없이 눈물 나게 우리를 찾아오는가.

언제나 이맘때쯤 이곳에 오면 그 모든 것이. 

날린다.

휘날린다.

떠돈다.

비를 뿌린 잔구름이 소리 없이 북쪽으로 가고 있다.

모든 것이 겨울의 종착으로 가고 있는 늦은 어스름. 

마치 하릴없는 노숙객처럼 카메라 하나를 메고 운부암을 오른다. 조금은 위압적인(?) 은해사 주차장을 얼른 피해 걸음을 재촉한다. 시간이 없는 탓이다. 빨리 걷기 싫어, 너무 빨리 걷기가 싫은데도 어쩔 수가 없다. 갑자기 추워진 탓인지 사람이 없다. 간간 잿빛의 스님 몇 분만이 수목의 터널을 걷고 있다.

운부암 아래쪽의 은해사는 운부암, 백흥암, 거조암, 백련암, 서운암 등의 그 이름만으로도 아름다운 보석상자를, 아니 보석암자들을 운위하고 있다. 덧보태 현판 대부분이 추사의 글씨로 장엄됐으니 그 이름이, 그 향취가 안개처럼 바다를 이루고 있다.   

이 은해사에 추사의 글씨가 이렇게 많은 것은 대화재 이후 1849년 중창을 담당한 주지 혼허 지조 스님이 평소 가깝게 지내고 있던 추사에게 편액 글씨를 간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마침 추사는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한강 용산 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추사는 은해사에서 화엄종지로 그 이름을 날리고 있던 영파 성규 스님과도 친분이 있었고 외고조부 되는 영조의 어제완문(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영조의 편지)이 있는 은해사 주지의 간청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추사의 흔적은 없다. 발자취가 없다. 정말 글씨만 쓴 것일까? 보이는 것은 울울 창성한 수목들이요, 들리는 것은 쉼 없는 물소리뿐이다. 그런데 문득 그의 〈세한도〉가 생각났다. 이곳의 소나무, 아니면 전나무, 그것도 아니면 잣나무, 그것에 생각이 닿았다. 그리고 그의 청년 시절. 그 시절의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노경을 따라서 관내의 명승지를 여행했다. 남다르게 어릴 적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그였기에 인근 곳곳의 사찰 순례도 겸했다. 그렇다면 당연 이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이다. 많은 사가들의 추정대로 추사가 영남 일원의 사찰을 탐구했다면? 의당 이곳은 빼놓을 수가 없었을 터. 특히 중국 종남산의 향적사를 그리워했던 그이고 보면, 이곳 운부암은 마음속 그의 본향쯤이 되지 않았을까?

저 바위 어디쯤에 청년 추사가 앉았거나, 아니면 저 절벽 위 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유배 인생을 한탄하며 술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왔거나 오지 않았거나 그것은 별개의 일, 추사의 글씨가 이렇게 은해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이 깊기 때문이다. 어쨌든 훗날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추사 선생 글씨 중 은해사의 서체를 이렇게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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