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와 구미 선산] 구미 선산과 모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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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와 구미 선산] 구미 선산과 모례가
  • 이하석
  • 승인 2023.09.2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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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례가毛禮家와 구미 선산 이야기
모례 가(家)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우물. 신라불교초전지 바로 옆 ‘아도모례원’에 있다.

모례 이야기

선산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가 있다. 모례(毛禮)라는 이다. 불교 전파와 관련된 이야기에 등장하는, 흔히 신라불교의 초전법륜의 자리로 일컬어지는 구미 도개 지역과 관계된 인물이다. 눌지왕(재위 417~458) 때 불법을 전하려는 일념으로 신라에 잠입한 아도가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 지역이었던 도개에 포교를 목적으로 잠입했는데, 이를 감싸준 이가 모례였다. (모례의 집이 있던 일선군은 지리적으로 고구려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왕경인 서라벌로 가는 길목이었다.)

모례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해동고승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약간 언급된 게 전부다. 기록에 따르면, 아도는 모례의 집에 머물면서 목동으로 변신, 낮에는 소 1,000마리와 양 1,000마리를 기르는 일을 했다. 모례가 이 지역에서는 대단한 재력가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활동을 했음을 짐작게 하는 가축 규모다. 그러나 밤에는 승려로 돌아가 사람들을 찾아다니거나 찾아오는 이들에게 불법을 강론하기를 수년간 계속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아도는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잠입, 불교를 전파하다가 위험하면 이곳으로 피해 와 숨고는 했다. 현 동국 최초 가람이라 칭하는 태조산(냉산) 도리사는 모례의 재력이 뒷받침돼 창건됐다고 한다. 

경북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마을 중앙에는 당시 모례 가(家)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우물이 남아 있다. 화강암 판석을 거칠게 다듬어 한 변의 길이 1.2m, 높이 40cm의 ‘정(井)’ 자 형태로 맞춘  고태미가 나는 우물이다. ‘모례’ 집안에서 사용한 것으로 전해져 전모례가정(傳毛禮家井)이라 불린다. 또는 모례장자샘, 모례정 등으로도 불린다. 경북문화재자료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모례와 관련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산이다. 이 우물로 해서 신라불교 포교의 시작과 더불어 신라 최초 사찰로 전해지는 도리사의 창건과 창건주 아도화상의 설화가 펼쳐지는 것이다. 

모래샘은 신라 초기에 만들어진 우물이다. 80년대 이전까지도 마을 중심에 자리해 주민들의 중요한 급수원으로 쓰였다. 이후 집마다 상수도가 들어서면서 식수로 쓰이지는 않고 샘 주위의 몇 집에서 허드렛물로 쓰였다. 

한편 이 마을 입구와 앞들에는 계주석(鷄舟石, 배를 매어두는 말뚝)이 두 개 있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모례의 집이 배가 떠내려가는 형상이라 해서 떠내려가지 못하게 매어두기 위해 세운 것”이란 마을 노인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소와 양 1,000마리를 길렀다는 소천골, 양천골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기도 한다. 모례에 대한 흔적은 이런 것들이 전부다. 

모례는 신라 최초의 불교신자였다. 지역 유지로 견문이 넓고, 포용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농토가 많고 가축을 많이 길러서 모례의 집은 늘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는 당시 고구려에 불교가 전파되는 걸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물론 고구려를 자주 왕래했을 터였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기에 그에 대한 소문은 고구려 승려들 사이에 꽤 알려져 있었고, 그래서 승려들은 국경을 통해 잠입하면 꼭 그를 찾았던 게 아니었던가 한다. 모례는 그 스님들을 감춰주고 숙식을 해결해 주면서 도왔다. 

그의 집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와 잠입한 승려들의 은신처였다. 묵호자(墨胡子)가 전법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됐을 때 집 안에 굴을 파 그를 수년 동안 숨겨주기도 했다. 이후 아도화상이 시자(侍者) 세 명을 데리고 왔을 때도 그의 집을 찾았다. 모례는 그들을 기꺼이 맞았다. 당시 토착 신앙에 의존하고 있던 신라에서 불교의 잠입은 대단히 위험시됐다. 그래서 아도화상 등 포교 승려들이 눈에 띄면 죽이려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모례는 신라불교의 토대를 마련한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다.

“양나라 대통 원년(527) 3월 11일에 아도가 일선군에 들어오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신사(信士) 모례의 집에 찾아오니, 모례가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지난날에 고(구)려의 승려 정방(正方)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군신(君臣)들이 괴상히 여기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그를 죽였고, 또 후에 멸구자(滅垢玼)라는 이가 다시 왔을 때도 죽였는데, 당신은 지금 무엇을 구하려고 여기에 왔습니까? 어서 문 안으로 들어와 이웃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면서 밀실에 모시고 공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해동고승전』 권1 ‘아도’조에 나오는, 아도화상이 일선군에 들어와 모례의 집에 들렀을 때의 장면이다. 이런 일은 불도가 아니라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례는 그야말로 ‘불도를 연(道開)’ 역사적인 일을 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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