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시 금오산(976m)은 산 전체가 급경사를 이루며 다양한 모양의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세를 따라 크고 작은 물줄기와 긴 계곡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또한 불교, 유교, 도교 등의 유서 깊은 문화유적이 금오산 곳곳에 산재해 1970년,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웅장한 산세는 행정구역상 구미시와 김천시, 칠곡군에 펼쳐져 있다. 그렇다 보니 지역마다 바라보이는 형세가 다르고 따라서 풍수적 해석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구미시에서 바라본 금오산의 풍수는 왕이 배출될 곳이라 하여, 자연스레 구미에서 태어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구미시(龜尾市)는 원래 선산군(善山郡) 구미읍이었으나 박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인연으로 1978년 2월 시로 승격됐다. 이후 전자산업 단지가 조성되며 젊은 층이 많이 유입되는 지방의 대표적 산업도시가 됐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은 금오산을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로 만들기도 했다. 반면 한때 부사가 파견되기도 했고,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朝鮮人才半在嶺南, 嶺南人才半在善山)”(이중환, 『택리지』)던 선산은 이제 읍 소재지로 남아 있다.
구미시의 곳곳에는 낙산리 가야 고분군,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둘러싼 영토분쟁지, 선산향교·인동향교·금오서원 등의 유구한 역사 자료는 물론, 풍부한 불교·유교·도교 유적지와 전설이 산재한다. 신라불교의 발상지인 구미시의 불교 유적은 선산의 아도 전설이 남아 있는 전(傳)모례가정과 도리사가 대표적이며, 옥성면 대둔사·무을면 수다사, 선산읍 죽장리 오층석탑·도개면 주륵사지 탑 등이 갖는 유적들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 여기서는 금오산의 불교 유적 중 대표적인 곳을 살펴보고자 한다.
금오산은 해발 1,000m가 채 안 되지만 암벽으로 되어 있어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쉽지 않다. ‘금오산(金烏山)’은 아도화상이 명명했다는 설이 있다. 저녁노을 가운데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산에는 해운사와 도선굴, 암봉 사이에 기묘하게 안착한 약사암과 석조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윤곽 뚜렷한 마애여래입상(보물), 선봉사의 대각국사비, 김천시 남면 오봉 쪽의 갈항사 등 유서 깊은 사찰이 즐비하다.
금오산에 오르기 전 먼저 구미역 인근의 금강사를 들러볼 만하다. 1952년에 창건된 이곳에는 1701년에 조성된 석조석가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이 있는데, 원래 금강산 마하연 법화원에 봉안됐던 것이라 한다. 도심 사찰이면서도 매우 조용하고, 전각의 분위기가 독특하다.
금오산저수지(금오지)의 오솔길을 걸으며 주차장을 지나면 고려 말의 충신 야은 길재의 충절과 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채미정(採薇亭)이 계곡물 건너에 보인다. 길재는 구미 고아읍에서 태어나 11세에 도리사에서 글을 배워 진사가 됐고, 고려 말 세 명의 충신인 ‘삼은(三隱,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야은 길재)’ 중 하나로 꼽힌다. 조선 태종 이방원과 동문수학하던 사이라 이방원은 그를 태상박사로 추천했으나,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금오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꺾어 먹으며 충절을 지켰다고 한다.
힘겨운 말년이었겠지만 채미정의 풍경은 너무 아름다워 오히려 풍요롭게 느껴진다. 잠시 그곳을 참배하고 다시 케이블카를 타는 곳으로 솔숲 따라 올라가면 우리나라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임을 알리는 거대한 표지석을 볼 수 있다. 구미시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명물이다.
산 중턱에 자리한 해운사까지는 케이블카를 타도 좋고, 산새 소리 들으며 작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일주문이 나타난다. 사찰 터의 지형을 고려하여 세운 해운사 일주문의 모습이 정겹다. 여기서 잠시 쉬며 숨을 고르고 신발 끈을 고쳐 맨다. 남은 길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계곡물 소리를 벗 삼아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도선굴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도선굴로 이어진 급경사의 잔도(棧道)에서 한숨 돌리며 저 아래를 바라보면 금오지가 보이고 그 너머 구미 시내도 한눈에 들어온다. 굴의 명칭처럼 이곳은 도선국사의 득도처이고, 또한 의상대사가 수행한 곳이라는 전설도 있으니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
다시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면 대혜(大惠)폭포가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금오산은 바위산이다 보니 전체적으로 수량이 풍부하지는 않다. 따라서 대혜폭포도 큰비가 온 후에야 제대로 된 폭포를 감상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예부터 조상들의 호연지기를 기르기에는 손색없는 곳이었다. 달리 명금(鳴金)폭포라는 이름도 전한다.
폭포를 지나 힘겹게 올라가면 고려시대부터 조성된 금오산성이 굳건하다. 산성은 천연의 암벽을 이용해 축성한 것으로 길이가 약 3.5km에 이른다. 테뫼형의 내성(850m)과 포곡식 외성(350m)의 이중구조로, 임진왜란 때에도 지역민의 안전을 위해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한다. 산성은 지금도 여전히 구미시를 지키고 있다.
산성을 지나 한참 올라가면 아도화상의 창건설이 전하는 약사암이 나타난다. 그는 어떻게 이런 험한 곳에 암자 지을 생각을 했을까? 아도화상은 선산의 전모례가정은 물론, 이곳 금오산 중턱까지 그 인연담을 남기고 있다. 이래저래 구미시의 불교는 아도화상과 분리할 수 없겠다.
의상대사와 약사암의 전설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의상대사가 금오산봉 동쪽 바위 아래 움막을 짓고 수행할 때 선녀가 내려와 하루 한 끼 공양물을 제공했다 한다. 그곳에 약사암이 세워졌고, 의상대사는 이후 영주로 가서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인 용성대사도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한편 약사암에 모셔진 수려한 석조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은 ‘지리산 삼형제불’의 하나라고 하니 옛님들의 신앙심과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웬만한 사람이라도 약사암까지 올라가기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좀 더 힘을 내어 올라가 볼 일이다. 정상 인근에 고려시대에 조성된 마애여래입상(보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마애불은 5m 이상의 거대한 자연 암벽의 모서리에 조성했기에 매우 입체적으로 보인다. 풍만한 얼굴에 눈, 코, 입도 뚜렷하며 광배와 대좌도 모두 갖추고 있어 애써 발품 팔아 찾아볼 가치가 충분하다. 마애불 앞에는 주추(기둥 밑에 괴는 돌)와 함께 크고 작은 기와 조각들도 흩어져 있어 이전에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마애불을 친견한 후 저 산 아래 황상동 마애여래입상도 함께 찾아볼 것을 권한다.
이제 고려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흔적을 찾아 칠곡군 북삼면 쪽의 선봉사(僊鳳寺)로 달려간다. 지금의 선봉사는 민가에 불상을 모신 형태의 작은 사찰이지만, 그 옆의 보호각 속에 자리한 「대각국사비」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의천은 고려는 물론 일본에서도 논소(論疏)류를 구했고, 직접 송나라까지 다녀와 속장경을 완성하며, 마침내 고려는 경·율·논 삼장(三藏)을 갖추게 됐다.
한편 의천은 문종과 인예태후의 4남으로, 불교 융합을 위해 교종과 선종을 통합해 천태교를 수립했는데, 이 비는 의천의 그런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1132년(인종 10)에 세워진 비문에는 의천이 천태교를 확립한 과정과 가르침 등이 실려 있다. 임존(林存)이 비문을 짓고, 승려 인(麟)이 글씨를 썼다. 물론 의천이 이곳 금오산에 온 적도 없고 비 역시 그의 입적 후 30여 년 만에 세워졌지만, 고려 불교계를 위한 의천의 노고를 담은 「대각국사비」의 섬세한 글씨체가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비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 여기까지 왔으니 인근의 아름다운 금오동천을 찾아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는 호사를 누려도 좋겠다. ‘동천’은 도교에서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에 붙이는 명칭인데, 금오산의 금오동천 역시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금오산의 불교 유적지 가운데 마지막으로 김천시 남면 쪽의 금오산 갈항사(葛項寺) 터로 가 보자. 갈항사 역시 지금은 작은 민가에 자리해 이름만 전할 뿐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금오산 정상의 가파른 절벽을 올려다보며 형성된 아랫마을에는 아름드리나무들과 작은 저수지가 조화롭게 펼쳐진다. 『삼국유사』, ‘승전촉루’조에 의하면 이곳은 화엄승 승전(勝詮)이 머물던 곳으로, 매우 외진 곳이기에 사실 큰 마음 내지 않으면 지금도 찾아가기 쉽지 않다.
의상대사가 당에서 귀국한 후, 중국 화엄종의 창시자 법장화상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중국 구법승 승전 편에 의상에게 전하는 편지와 책 등을 보냈다고 한다. 그중의 한 권이 80권 본 범본 『화엄경』이었다. 이후 승전은 갈항사에서 80여 개의 돌무더기를 놓고 화엄학을 강의했다고 한다.
갈항사 터에 남아 있는 석조여래좌상(보물)은 758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매우 완성도 높은 수작으로 꼽힌다. 한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단아한 모습의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국보)이 자리하고 있다. 동탑의 명문에 의하면 두 탑은 통일신라시대인 758년에 영묘사 언적법사 3남매에 의해 조성됐다고 한다. 탑들은 일본으로 반출될 뻔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경복궁에 안치됐었다고 한다.
이렇게 금오산은 강골의 수행승처럼 단단한 자세로 곳곳에 유서 깊은 사찰을 품고 있었다.
사진. 유동영
계미향
「한국 고대의 천축구법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겸임교수, 동국대 불교학술원을 거쳐 현재 선리연구원 상임연구원으로 있다. 천축구법승과 중국구법승 등 고대 스님들의 대외 교류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으며, 저서로 『고려 충선왕의 생애와 불교』, 『한국 고대의 천축구법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