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업보의 고통이 가장 큰 곳을 삼악도(三惡道)라 한다. 삼악도는 육도(六道) 중 아수라도·인도·천도를 제외한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세 곳을 말한다. 지옥도의 고통이 가장 크지만, 아귀도 역시 만만치 않다. 불교는 고통과 그 구제를 말한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분은 지장보살이다. 그렇다면 아귀도에서 고통받는 중생은 누가 구제할까? 아귀를 구제하는 의식으로 우란분재(盂蘭盆齋)가 가장 많이 알려졌지만, 수륙재(水陸齋) 역시 아귀와 관련된다. 우란분재에서 구원의 주인공은 목련(目連)이다. 그렇다면 수륙재에서는? 아난(阿難)과 면연귀왕(面燃鬼王)이다.
오늘날 수륙재 설행(設行) 현장을 보면, 면연귀왕은 배고픈 아귀들의 왕에서 보살이 된다. 그러나 역동적으로 신분이 전환된 주인공인 면연귀왕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적다. 일상 의례의 귀의 대상인 ‘보살님’도 아니고 제석천이나 팔부중 같은 ‘신중님’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 대재(大齋)인 수륙재 의례 현장에서, 혹은 감로탱(甘露幀) 도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난 그리고 면연귀왕을 중심으로 한 아귀와 중생 구제라는 ‘대자비심’이 수백 년 동안 잊히지 않고 때론 재해석되어 왔던 점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면연귀왕(面燃鬼王)
사찰마다 창건 연기(緣起) 설화가 있듯이 우란분재나 수륙재 같은 큰 재(齋)도 설행하는 이유를 담은 연기 설화가 있다. 재를 설행하는 의례 공간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한시적이든 반복되는 것이든 수행과 중생 구제를 위한 도량이 된다. 재 중에서 가장 큰 재는 수륙재로 ‘천지명양수륙재의(天地冥陽水陸齋儀)’나 ‘수륙무차평등재의(水陸無遮平等齋儀)’라 일컫는다. ‘천지(天地)’는 하늘과 땅을, ‘명양(冥陽)’은 밝음과 어둠으로 대응되는 이승과 저승을, ‘수륙(水陸)’은 물과 육지에 사는 중생을 말한다. ‘무차(無遮)’란 천지·명양·수륙 중생을 위한 가르침의 은택이 가려짐 없이 고르게 미침을 뜻할 것이다. 옛사람들의 세계관 범주에서 생각해 낸 최대의 공간적 시간적 표현인 셈이다.
재를 베풀어 미치는 은혜로움과 이익이 하늘만큼 땅만큼 물길만큼 크기와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밝은 낮에도 있는 어두움, 어두운 밤에도 있는 밝음의 명양 세계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크나큰 베풂의 대승사상을 의궤화한 것이 수륙재 같은 대재다. 수륙재를 지내는 이유를 밝힌 것이 ‘수륙연기(水陸緣起)’다. 등장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난, 그리고 면연귀왕(초면귀왕焦面鬼王)[도판 1]이다. 매우 독특한 캐릭터인 면연귀왕은 목은 바늘처럼 가늘고 무엇을 먹더라도 그대로 불꽃처럼 토해낼 수밖에 없는 아귀들과 기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
『정법염처경』 등에서는 “중생의 날뛰는 탐욕으로 ‘보시’를 행하지 않는 자는 업의 형태에 따라 36종류의 아귀 중 하나의 과보를 받는다”고 말한다. 수륙재 의식문에서는 면연귀왕이 36종류의 아귀가 사는 36부(部)의 왕으로 나타난다. 언제 어떤 업보를 받아 아귀 세계의 왕이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강(江)의 고통
아귀들의 업보가 주로 미치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강(江)이다. 강은 망자와 관련이 깊고 수많은 민간설화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망자들은 저승길에서 강을 건너야 하지만, 세찬 물결에 건너지 못한다. 사십구재의 소의경전인 『시왕경(十王經)』을 보면, ‘나하진(奈何津)’이라는 나루터 이름으로 잘 알려진 강이 있다. 여기서 나하(奈何)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뜻이다. 저승길에 들어선 망자가 나루터에서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하는 모습이 이름이 됐다.
목이 바늘처럼 가늘고, 먹은 것은 무엇이든 불꽃처럼 토해내는 아귀들에게 강은 또 다른 고통을 안겨준다. 경전에서 아귀들은 주로 항하강(恒河沙) 기슭에 모래알처럼 많이 모여 있다. 항하강은 나하진의 일렁이는 검푸른 물이 아니라 매우 맑고 시원한 물이다. 그렇지만 아귀들은 두터운 업장으로 항하강의 물이 아무리 시원해 보여도 그 물을 마실 수 없다. 마신 강물마저 불꽃으로 토해내기 때문이다. 우란분재의 소의경전인 『불설대목련경』에도 이러한 장면이 나오는데, 지옥에서 아귀로 떨어진 목련의 어머니도 항하강의 물을 마실 수 없었다.
아귀에게는 먹는 것, 특히 마시는 물조차 고통이 되기에 그를 구원하는 무대 역시 강이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감로탱에 아귀와 항하강 도상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이유다. 감로탱에는 아귀와 관련된 두 종류의 물이 묘사된다. 감로탱 아래쪽에 표현된 아귀는 항하강 기슭에 머물며 맑고 시원한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물을 마시고자 하지만 단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는 업장을 표현한다. 위쪽에 있는 아귀는 수륙재의 시식(施食)을 통해 깨끗하고 청량한 감로를 마심으로써 타는 듯한 번뇌의 고통에서 구제됨을 표현하고 있다[도판 2, 3].
금강산의 수행도량인 건봉사(乾鳳寺)에서 <남한산성 국청사 감로탱>(1755)을 그린 화승은 도력이 높아 이 항하강에서도 아귀의 구제를 봤다. 항하강의 물안개와 같은 것을 번뇌의 먹구름으로, 이것의 걷힘을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이해했다. “나무 대성비증보살(南無大聖悲增菩薩)”이라는 면연귀왕 도상에 “항하수반수운암암거열상미(恒河水畔愁雲暗暗去挰相羙)” 즉, ‘항하의 강기슭에 먹구름이 걷히니 열반의 정경이 아름답도다’라는 화격 높은 문구를 더해 놓았다. 또 하나 아귀의 구제와 관련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천수물[千手水]’이다. 스님들의 발우공양 의례에는 어김없이 아귀가 등장한다. 스님들은 공양이 끝난 뒤 발우를 씻은 물을 모아 버리는데, 아귀들이 와서 이 천수다라니가 비친 깨끗한 천수물을 마시는 것이다. 아귀의 구제는 ‘먹는 것’과 연동돼 ‘생명’에 대한 불교의 오랜 성찰이 더해지면서, 불가(佛家)의 일상적 스토리텔링 속에서 안착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아귀들이 받는 공덕은 적으며, 직접적 구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수륙재에 이르러서야 아귀는 비로소 구제된다.
아귀의 구제
배고픔의 무한반복이라는 숙명을 지닌 아귀는 어떻게 구제될까? 수륙재에서는 아귀들의 구제를 어떻게 표현할까? 수륙연기 설화에서 아귀의 왕 면연귀왕은 지혜로운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방편으로 선택된 사람이 부처님의 제자 아난이다. 『불설구면연아귀다라니신주경』을 따라가 보자. 어느 날 밤 아난이 고요한 곳에 머물러 수행하고 있을 때, 불현듯 면연귀왕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말한다. “앞으로 3일 후, 그대의 목숨이 다해 곧 내가 있는 아귀 세계에 태어날 것이다”라며 무시무시하게 겁박한다. 그리고 해답까지 제시한다.
“그대가 동틀 무렵에 백천(百千) 나유타(那由他) 항하(恒河)의 모래 수같이 많은 수의 아귀와 백천 바라문(婆羅門)과 선인(仙人)들에게 보시하되, 마가다국(摩伽陁國)의 말[斗]로 각각 한 말의 음식을 보시하고, 또 나를 위해 삼보께 공양을 올리면, 그대의 수명은 늘어나고, 나는 아귀의 고난에서 벗어나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아난이 면연아귀를 보니 “여위고 바짝 말라 아주 추해 보였으며, 얼굴은 불타듯 이글거리고 목구멍은 바늘구멍처럼 좁았으며,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의 쑥대머리에 터럭과 손톱은 길고 날카로웠고, 몸은 무거운 것을 진 듯” 했다. 아귀의 왕이지만 영락없는 거지왕의 모습 그대로다.
아난이 두려워 석가모니 부처님께 급히 달려가 여쭈니 그 방편으로 ‘일체덕광무량위력다라니(一切德光無量威力陀羅尼)’를 설하셨다.
“내가 전생에 바라문이었던 적이 있었느니라. 그때 관세음보살과 세간자재덕력(世間自在德力) 여래께서 계신 곳에서 이 다라니를 받아, 내가 이 다라니의 위신력으로 한량없고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아귀와 바라문과 선인들이 모두 만족할 만한 음식을 보시하였느니라. 내가 모든 아귀에게 음식을 보시하였기 때문에 아귀의 몸을 벗어나서 천상 세계에 태어났느니라. 아난아, 네가 지금 이 다라니를 받아 지니면 반드시 너 자신의 몸을 구호할 것이니라.”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5,000명이 배불리 먹은 기독교의 오병이어(五餠二魚)에 비해, 경전에서는 다라니만으로도 충족되고 있다. 그런데 수륙재 의식집에 이르러서는 대상과 규모가 놀라울 정도로 확장된다. 시식 의식에서 베푸는 감로만으로도 아귀뿐만 아니라 일체의 유주고혼(有主孤魂, 재주齋主가 있는 영가)과 무주고혼(無主孤魂), 미물 등 일체에 이르기까지 은혜로운 혜택이 미치니 말이다.
면연귀왕에서 비증보살로
경전에서는 이렇게 석가모니불과 아난, 면연귀왕에 의해 아귀의 구제가 시작된 것을 밝힌다. 실제 수륙재 의식에서도 석가모니불과 아난존자, 면연귀왕도 봉청의 대상이 된다. 봉청(奉請)은 불보살이 의식 도량에 오시도록 청하는 것을 말한다. 봉청의 대상은 부처님과 아난존자에 더해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까지 확대되기도 한다. 면연귀왕은 처음부터 보살의 격에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후에 봉청의 대상으로 승격한다. <안성 청룡사 감로탱>(1692) 등에는 봉청 의식을 통해 드러난 면연귀왕의 모습이 표현돼 있다[도판 4]. 아귀의 왕인 면연귀왕이 봉청의 대상으로, 더 나아가서는 보살로 승격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남장사 감로탱>(1701)을 보면, 아난과 아귀 둘이 그려져 있고, 아귀 옆으로 “기교대사면연귀왕(起敎大士面燃鬼王)”이라는 글씨가 있다[도판 5]. 기교대사(起敎大士)는 ‘방편의 가르침을 일으키는 대사’를 뜻한다. 아난이야 당연히 그럴 수 있으리라 짐작한다. 특이한 것은 면연귀왕마저 불법을 일으키는 ‘대사’로 승격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실제 재에서는 아난을 대신한 법주(法主)가 재를 주재하고, 면연귀왕은 법주의 의례 행위를 통해 구제의 공간으로 대자비의 화신으로 불리며 초청된다. 이제 수륙재에서 아난과 면연귀왕이 봉청의 대상으로 청해지는 과정을 보자.
먼저 아난. 아난은 어떤 위격을 지니고 있을까? 의식문으로 초청될 때 삼보의 대상이기에 『법계성범수륙승회수재의궤』(1470)에서는 상단(上壇)인 <봉청상위편(奉請上位篇)>에 나타난다.
“귀의하옵고, 홀로 고요한 곳에 머무실 때 일찍이 초면귀왕(면연귀왕)을 만나 사바세계에 무차대회라는 것을 설행하신 기교대사 아난존자와 그 여러 권속을 일심으로 받들어 청하옵니다(南無一心奉請 獨居靜處 曾見焦面鬼王 娑婆界中 稱設無遮大會 起敎大士阿難尊者幷諸眷屬).”
기교대사인 아난은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낮다. 극적 요소가 약하기 때문이지만, 아난을 대신하는 법사는 ‘관상(觀想)’을 통해 눈에 보듯 환히 구제의 과정들을 어긋남이 없이 재현해야 하는 중요한 지위에 있다.
두 번째 우리의 주제인 면연귀왕. 『자기산보문(仔夔刪補文)』(1724)에 나타나는 면연귀왕은 하단(下壇) <고혼찬청의문(孤魂讚請儀文)>의 대상이다.
“귀의하옵고, 방편의 가르침을 일으켜[乘權起敎] 널리 굶주림을 제도하시고 악도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처럼 귀왕의 여윈 모습으로 나타나신 대성 초면귀왕·비증보살마하살을 일심으로 받들어 청하옵니다(南無一心奉請 乘權起教 普濟飢虛 爲救於惡道衆生 故現此王羸之狀 大聖焦面鬼王 悲增菩薩摩訶薩).”
면연귀왕은 마치 추증된 왕처럼 ‘대성인(大聖人)’의 칭호가 붙여졌으며 대자비의 ‘비증보살(悲增菩薩)’로 청해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면연귀왕이 하나가 아닌 둘로 그려진 쌍아귀 그림이다. 한쪽 귀왕은 배고픈 아귀들의 왕인 면연귀왕의 측면이고, 다른 한쪽은 대자비심을 일으켜 아귀들의 구제에 이르게 된 비증보살마하살의 측면이다.
쌍아귀 도상은 우란분재에서 “명부 지옥세계의 남자와 여자를 각각 다스린다는 두 명의 왕인 ‘쌍왕’ 남매 설화와도 습합” 돼 더욱 지속화된 측면도 있다. 어떤 경우 면연귀왕은 신중(神衆)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감로탱>(19세기 초)을 보자[도판 6].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독특한 화풍의 소유자이자 방장(方丈)이었던 신겸(信謙)이 그린 것이다.
면연귀왕 도상을 대중들과 보다 가까운 위격으로 재해석해 놓았다. 놀랍게도, 감로탱에서 수백 년 동안 맨발의 왕발로 그려지던 면연귀왕에게 제재초복(除災招福, 재난을 막고 복을 가져다주는) 신중님들이 신는 가죽신을 신긴 것이다. 아귀들의 왕인 면연귀왕은 방편의 가르침을 일으킨 보살로도 신중으로도 나타나고 있어, 이미 대중적 신앙으로 발현될 기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수륙재와 감로탱에서는 번뇌의 원인이 되는 갈애(渴愛), 즉 불타는 목마름을 깨끗하고 청량한 감로(甘露)로써 결국에는 해소할 수 있도록 하는 큰 인연이 만들어진다. 또한 아귀뿐 아니라 일체중생의 구제라는 ‘대자비심의 대승사상으로 회향’하는 클라이맥스가 이뤄진다. 지옥보다는 약한 아귀도에 머무는 아귀의 왕, 면연귀왕이 운명의 전환을 위해 스스로 일어서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설정이 아니다.
강영철
동국대에서 인도철학과 미술사를 공부했으며, 진관사수륙재보존회 수석연구위원으로 진관사 국행수륙재 설행에 동참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시대 수륙재와 감로탱:
불교의례의 시대도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