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이 꿈꾼 삼국유사 비슬산] 일연의 자취(3) 인흥사와 용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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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이 꿈꾼 삼국유사 비슬산] 일연의 자취(3) 인흥사와 용천사
  • 신선혜
  • 승인 2023.03.28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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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를 꿈꾸다
인흥사(仁興寺) 터 3층 석탑. 일연 스님이 중창하면서 왕이 친필로 인홍사(仁弘寺) 현판을 하사해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은 폐사돼 ‘남평문씨 세거지’가 위치한다. 석탑만이 이곳이 절터였음을 보여준다. 

 

다시 비슬산으로

『삼국유사』는 일연 스님의 대표 저술로, 『삼국사기』와 함께 삼국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제1의 사료다. 특히 한국 고대부터 고려에 걸친 불교문화에 대한 방대하고, 때로는 착종된 기록을 수집・정리하고 현장을 직접 답사한다. 이처럼 일연 스님은 잃을 수도 있었던 불교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스님으로서뿐만 아니라 학자적 태도로 『삼국유사』를 집필했다. 이러한 가치는 일찍이 『삼국유사』를 처음으로 근대적인 활자로 간행한 최남선이 “삼국유사는 어느 의미로 말하면, 조선 상대(上代)를 혼자 담당하는 문헌이라고도 할 만하니, 조선의 생활과 문화의 원두(源頭)와 고형(古形)을 보여주는 것이 오직 이 책에 있을 따름이다”라고 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삼국유사』의 찬술을 꿈꾼 곳이 바로 비슬산이었다. 

일연 스님이 생애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 역시 비슬산이다. 군위 인각사에 세워진 「보각국존비」에 따르면, 스님은 여러 사찰을 두루 다니며 수행했지만 특히 비슬산에서는 상당 기간 주석하며 장년기를 보냈다. 비슬산에서 젊은 시절 20여 년을 머물다가 강화도, 남해 등 당시 중앙권력과 가까운 지역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60세 가까운 나이에 다시 비슬산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비슬산에서의 수행이 일연 스님의 행보에 많은 영향을 줬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스님이 비슬산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인흥사(仁興社)였다. 인흥사는 비슬산 북쪽 기슭, 현 대구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로 비정된다. 지금은 통일신라 때 만든 것으로 보이는 3층 석탑만이 이곳이 절터임을 말해주지만, 일연 스님이 주석한 이후 조선 초까지 인흥사는 사세(寺勢)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흥사라는 이름은 원래 인홍사(仁弘社)였던 것을 일연 스님이 중창하자 왕이 친필로 현판을 하사하면서 바뀐 것이다. 그만큼 고려 후기 인흥사는 비슬산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조선 초까지도 이 일대의 곡식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를 이 사찰을 빌려 지었을 정도였으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폐사되어 더 이상 조선 후기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게 됐다.  

일연 스님은 인흥사에서 10여 년 이상 머물면서 비슬산의 또 다른 절인 용천사(湧泉寺)를 중수하고 불일사(佛日社)로 이름을 바꾸는 등 비슬산과 그 주변의 불교를 현창하는 데 힘썼다. 비단 인흥사 주지로 있었던 시기뿐만 아니라 왕명에 의해 운문사 주지가 된 후에도 인흥사와 용천사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는 인흥사에서 『역대연표(歷代年表)』를 간행하고, 불일사 결사 시 썼던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에 왕이 제액을 쓰고 압인하여 불일사에 보관하도록 한 일 등에서 알 수 있다. 용천사 역시 임진왜란 때 사세가 기울었지만,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중건이 이루어지면서 현재도 법등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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