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과 꽃과 암괴류의 산
비슬산 높이는 1,084m, 최고봉은 천왕봉이다. 대구 달성군의 가창·화원·옥포·현풍·유가·논공 6개 읍면과 경북 청도에 걸쳐 있는 큰 산괴(山塊)다. 주위에 청룡산(794m)·최정산(905m)·우미산·홍두깨산 등을 거느리고 있다. 산세는 남으로 뻗어서 창녕의 화왕산과 닿는다.
팔공산(1,193m)과 비슷한 높이와 많은 골짜기를 갖췄으면서도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은 듯하다. 다만 대구 분지의 남쪽에 솟은 예사롭지 않은 거대한 산괴 정도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비슬산은 그 덩어리가 크면서도 신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어서 아득한 옛날부터 신성한 산으로 간주돼왔다.
선사시대는 물론, 삼국시대 이전의 주거지와 무덤군 등 유적지와 유가사·소재사·용연사·용문사·임휴사·용천사 및 복원된 대견사 등 많은 사찰이 골짜기마다 산재해 있다. 1986년 2월 22일에는 달성군 군립공원으로, 1993년 1월 18일에는 자연휴양림으로 지정돼 독특한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1,000m 이상의 정상 지역은 30만 평(100만m2)의 거대한 평원이 전개되는데, 참꽃(진달래) 군락지를 이뤄 매년 4월 봄이면 비슬산 참꽃문화제로 유명하다.
산 이름인 ‘비슬’은 비파 비(琵) 자와 거문고 슬(瑟) 자를 합친 글자다. 지금까지 소슬산(所瑟山)이니, 포산이니, 비들산이니, 비파산(琵琶山)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대견봉의 큰 바위 형상이 비둘기 같다고 해서 비들산으로 불리다가 이 이름이 변용돼 비슬산이 됐다고도 한다. 정상의 바위 모양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 같아서 비슬산으로 불린다고도 한다. 포산(苞山, 또는 包山)으로 불린 건 수목에 덮여 있는 산이라는 의미에서다. 산의 남서면을 흘러내리는 바위 너덜지대의 규모가 큰데, 이 바위군을 합쳐서 이 산의 암괴류(岩塊流)가 2003년 천연기념물 제435호로 지정됐다.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화강암의 거석들인데, 국내에 분포하는 암괴류 중 규모가 가장 커서 학술적·자연 학습적 가치가 크다.
약속과 정진의 산
비슬산 산신은 정성천왕(靜聖天王)이다. 산신은 꿈을 갖고 있었다. 가섭불 시대에 부처님의 앞에서 맹세했다.
“발원하나이다. 지금 바로 성불하지 않고, 앞으로 이 산에서 1,000명의 성인이 나올 때까지 성불을 유보하겠나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서원이며 발원인가. 그리하여 이 산에서 돋아날 성인들을 위해 정성천왕은 봄이면 진달래 등 온갖 꽃들을 피우고, 여름이면 수많은 푸나무로 온 산을 장엄해 왔다. 그렇다. 비슬산은 일천(一千)의 성인이 약속된, 미래로 열린 산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산에는 많은 성인이 예부터 깃들어 왔다. 고려시대 보각국사 일연(普覺國師 一然, 1206~1289) 스님이 살았던 때까지만 해도 이 산에는 관기, 도성, 반사, 첩사, 도의, 자양, 성범, 금물녀, 백우사 등 아홉 성인의 행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비슬산은 또한 정진의 산이다. 앞서 열거한 성인들의 가열한 수행이 이어졌고, 그 열정은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紫茅黃精肚皮(자모황정축두피) 붉고 누른 풀 엮어 앞을 가리니,
蔽衣木葉非蠶機(폐의목엽비잠기) 나뭇잎 옷이요, 길쌈한 베 아니네.
寒松颼颼石犖确(한송수수석락학) 바위 위 앙상하게 여윈 소나무뿐인데,
日暮林下樵蘇歸(일모임하초소귀) 해 저문 숲속으로 나뭇짐 하고 돌아오네.
夜深披向月明坐(야심피향월명좌) 한밤중 달빛 향해 도사리고 앉으매
一半颯颯隨風飛(일반삽삽수풍비) 몸에 걸친 옷 바람 부는 대로 반 남짓 날도다.
敗蒲橫臥於憨眼(패포횡와어감면) 거적자리에 가로누워 단잠 들자니,
夢魂不到紅塵覊(몽혼부도홍진기) 꿈속에도 티끌세상 갈 바 있으랴.
雲遊逝兮二庵墟(운유서혜이암허) 두 암자 빈터에는 구름만 오락가락,
山鹿恣登人跡稀(산록자등인적희) 사슴은 오르건만 인적은 드무네.
__ 『삼국유사』 권5 제8 「피은」편 ‘포산이성(包山二聖)’
반사와 첩사를 기린 일연 스님의 노래다. 자연 속에 몸을 묻은 채 정진하는 자세와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일연 스님은 1227년 선불장(選佛場)의 상상과에 합격한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이 산에 들었다. 보당암에 머물며 참선 삼매에 들기를 계속,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큰 산의 기운을 마음껏 받았다. 44세 때 남해 정림사로 옮기기 전까지 20여 년을 비슬산에서 보냈다. 도통바위 아래 도성암에서 출발하여 관기봉 아래의 관기암까지 걷기도 하면서 이 지역에 전해오는 도통과 도인들의 이야기를 적어놓기도 했다. 이 기록은 나중에, 그의 불세출의 명작으로 꼽히는 『삼국유사』에 실린다.
일연 스님은 남해와 강화도, 오어사를 거쳐 다시 비슬산으로 돌아온다. 인홍사(비슬산 북편, 현 남평문씨 세거지)의 주지가 되어서였다. 때때로 전국 곳곳을 떠돌기도 했지만, 이내 비슬산으로 돌아와 정진하기 일쑤였다. 그만큼 그의 삶에서 중요한 곳이었고, 수행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던 산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수행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산의 북쪽 용의 골짜기에 있는 용연사의 금강계단은 여전히 그런 수행의 버팀목이다. 비슬산은 수많은 성인의 출현을 기다리며, 신령스러운 산 기운을 오롯이 피워내고 있다.
그리움의 산길
비슬산 대견봉에 대견사지가 있다. 절터만 있다가 2014년 절이 복원됐다. 높은 산정에 반듯하게 놓인 절 자리다. 비슬산 정상이 북쪽에 솟았고, 남쪽으로는 관기봉이 뾰족하게 서 있는 게 보인다. 멋진 조망을 두고 ‘하늘의 절터’라 하기도 한다. 절 앞 큰 바위 위에는 3층 석탑이 서 있다. 바위를 바닥으로 하여 그 위에 두 층의 기단을 얹고, 탑을 세웠다. 절터가 있는 산정 전체가 바닥이 되는 셈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 할 수 있다. 그 높은 자리를 두고 예부터 ‘북(北)봉정 남(南)대견’으로 부르기도 했다.
대견사(大見寺)는 810년 신라 헌덕왕 때 보당암(寶幢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됐다고 추정한다. 태종 16년(1416), 세종 5년(1423)에는 석조관음상이 땀을 흘렸다는 왕조실록의 기록도 전할 만큼 이 절은 영험이 있고 신령스러운 이적이 행해지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조선 광해군과 인조 대에 와서 다시 중창되며 대견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됐다. 임란 당시 절이 많이 퇴락했을 때 들보 위에 책자가 있었는데, 산세가 대마도를 누르는 곳이어서 이 절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초유사 김성일이 그 기록을 읽었다고 하나, 그 후 이 책은 분실됐다. 또는 전해오는 풍수 이야기로는 대견사 자리는 멀리 대마도를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자리에 절을 지으면 대마도가 조금씩 우리나라 쪽으로 끌려온단다. 일본의 기운을 막는 중요한 혈자리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 고려가 대장경을 만들어 몽골군을 물리치려 한 것처럼 신라는 이 절을 지어 왜의 발호를 막으려고 한 것 같다는 추측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기피 대상이 됐을까?
대견사 넘어 정상으로 올라 유가사 위 도성암으로 이어진 산길은 비슬산 산행의 주요 루트다. 이 산길은 바로 옛 도인들이 오갔던 길이기도 하며, 도반들이 나누었던 우정과 그리움의 산길이기도 하다. 바로 『삼국유사』에 전하는 관기와 도성이 오갔던 길인 것이다. 관기는 산의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지었고, 도성은 북쪽의 굴에서 지냈는데, 자주 왕래했다. 서로 부르는 통신의 방식이 범상치 않았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바람이 관기가 있는 남쪽으로 불어 나무들이 모두 그쪽을 향해 굽었다. 반대로 관기가 도성이 보고 싶으면, 바람이 북쪽으로 불어 나무들이 도성이 있는 쪽으로 일제히 굽었단다. 그들의 왕래는 곧 삼라만상과 더불어 통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바람과 구름과 온갖 나무들이 서로 감응하는 만남. 그렇게 서로의 도는 함께 익어갔고, 거의 동시에 성불했다. 그들이 오갔던 우정의 길은 지금도 여전히 이 산의 정상에 남아 있는 것이다.
사진. 유동영
이하석
1971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투명한 속』, 『김씨의 옆얼굴』, 『우리 낯선 사람들』, 『연애 간(間)』, 『천둥의 뿌리』, 『향촌동 랩소디』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