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이 꿈꾼 삼국유사 비슬산] 대견사 복원한 성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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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이 꿈꾼 삼국유사 비슬산] 대견사 복원한 성문 스님
  • 김남수
  • 승인 2023.03.2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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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줄을 이은 복원 불사

험난했던 복원 불사

대견사는 10년 전만 하더라도 3층 석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산문이 다시 열린 때가 2014년 3월 1일. 복원된 지 9년 지났다. 인터뷰를 진행한 날 대구 시내에는 비가 내렸지만, 대견봉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안개가 자욱해 10m 앞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비슬산 정상의 대견봉과 천왕봉은 서로 마주 보며, 그 사이에는 큰 분지가 있다. 이곳에서 4월 중순 ‘비슬산 참꽃문화제’가 열리는데, 이때 비슬산을 찾는 인파가 30만 명이 넘는다. 대부분의 인파는 대견봉 아래에 위치한 대견사를 통해 정상으로 향한다.

“대견사를 복원하면서 이 불사가 ‘최초의 폐사지 복원’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몇몇 폐사지가 복원됐지만, 대견사 복원이 최초라고 합니다.”

폐사지 복원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특히 대견사같이 땅 소유권이 사찰이 아니고, 지자체 소유이거나 국유재산일 경우는 시도 자체가 무모한 일이다. 성문 스님이 2010년 동화사 주지로 부임한 후, 2012년 달성군청과 동화사가 업무협약을 맺으며 복원이 시작됐다. 2013년 3월 1일 기공식을 했고, 2014년 3월 1일 개산대재를 봉행했다. 법당과 요사채를 마련하면서 1차 복원이 마무리됐다. 

“당시 김문오 달성군수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달성군의 의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죠. 달성군민들도 뜻을 모았죠. 불자였던 군수의 소명과 원력, 달성군민들의 협조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류병선 대구시 신도회장과 한삼화 동화사 신도회장의 원력도 꼬집어 말한다. 동화사 소임을 맡은 스님들과 신도들이 합심해 이룬 불사라 한다. 대견사를 늠름히 지키고 있는 3층 석탑은 대구시 지정 문화재고, 주변을 호위하는 암괴(巖塊)는 천연기념물이다. 소중히 간직할 유적이지만, 복원 과정에서 하나하나가 시간을 더 늦췄다. 사지 복원을 위해서는 대구시 문화재위원회 심의와 문화재청 심의를 거쳐야 했다. 현상변경 심의는 3차례나 유보됐다. 또 다른 변수가 ‘발굴’이었다. 이전에 발굴이 있었지만, 또 발굴해야 했다. 하나하나가 짧으면 1~2개월, 길게는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고, 갈수록 비용이 추가됐다. 성문 스님은 불사 과정에서 100번 넘게 대견사지를 다녀갔다. 어떤 날은 이른 아침에, 다른 날은 저녁에 올라 ‘대견봉 아래에 어떻게 건물을 얹을까’라는 상상을 수시로 했다.

“대견사 복원은 비슬산의 끊어진 거문고 줄을 잇는 일이라고 노스님들이 말씀하시곤 했죠.”

 

비슬산의 거문고 줄

대견사 복원은 대구 불교계의 숙원이었다. 많은 스님이 복원을 시도했고, 조계종이 아닌 다른 종단에서도 복원을 준비했었다.

“대견사는 1917년 일제 강점기에 폐사됐습니다. 대견사 기운이 일본의 기를 억누르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대구 현풍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피신 은둔해 폐사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1970년대 동화사 주지를 역임하신 서운 노스님께서는 ‘대견사 복원이 비슬산의 끊어진 거문고 줄을 잇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죠.” 

복원하면서 불사리탑을 조성했다. 법당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불사리를 안치한 탑을 조성했다. 민족정기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기공과 준공을 모두 3월 1일에 맞췄다. 재밌는 이야기는 2014년 준공 시기를 맞춰 대견봉(현 천왕봉)과 천왕봉(현 대견봉)의 이름을 맞바꿨다는 것이다. 비슬산에서 대견사가 갖는 상징성을 보여준다. 3층 석탑이 대견사의 상징으로 알려졌지만, 신라시대 축대도 주목할 만하다. 신라 때부터 내려온 우물이 있는데, 아직도 물의 양이 적지 않다. 절을 복원하면서 우물을 다시 팠는데, 이전 우물의 물이 줄어들까 노심초사했다고. 대견사 물이 좋아 달성군에서 천천수(千泉水)라는 관광상품을 만들기도 했다. 절을 복원하기 전에도 이름난 기도 터였다.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주지 법희 스님이 한 말씀 거든다.

“복원 전에 대견사 터는 만신들의 기도 터였습니다. 공사를 시작하면서 그분들과 실랑이가 꽤 오래 지속됐죠. 지금도 밤이면 참꽃 군락지에 조그만 텐트를 치고 기도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비슬(琵瑟)이라는 산 이름에 ‘임금 왕(王)이 네 번 쓰였다’고 해, “이 지역에서 네 명의 대통령이 나왔다”라는 호사가들의 말이 있다. 이런 이유인지 위정자들이 자주 찾는 기도 터로 알려지고 있다. 성문 스님은 “네 명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죠. 오히려 사부대중(四部大衆), 혹은 사해동포(四海同胞)를 섬기는 자가 있으면, 그런 분들이 대견사의 기를 받을 것”이라 말한다.

“대견(大見)은 크게 보는 것입니다. 이는 불교를 관통하는 정견(正見)을 의미합니다.”

 

복원의 의미

해발 1,000m 넘는 대견사를 오르기 위해서는 등산해야 한다. 임도(林道)가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대견사에는 주말이나 법회가 있는 날에만 차량 운행을 한다. 삼귀의계를 지키고, 믿음이 굳건한 신도만이 차량에 탑승할 수 있다. 현재 200명이 넘는 신도가 월 기도를 올리며 대견사를 다니고 있다.

“대구는 북으로 팔공산, 남으로 비슬산이 있죠. 1,000m 넘는 산들이 호위하는 도시가 몇 없죠? 대구의 중심은 비슬산이었습니다. 대견사는 그곳을 지키고 있죠.”

대견사 복원에 남은 과제가 하나 있다. 건물은 ‘대한불교조계종 대견사’로 등기돼 있지만, 땅의 소유는 아직도 ‘달성군’이다. 복원 과정도 힘들었지만, 현재 운영과 향후 불사를 위해서도 해결해야 할 일이다. 1917년 폐사될 때의 기록을 찾아 제자리로 돌리는 일이 남았다 한다. 

또 하나는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찾는 일과 일연 스님이 주석했던 묘문암과 무주암을 찾는 일이다. 비슬산에는 본래 거처를 알 수 없는 좌불이 있고, 폐사지 터도 있다. 스님은 그곳이 ‘일연 스님과 인연이 있지 않을까?’ 하며 산을 오르락내리락한다. 그곳 역시 모두 지자체 소유의 땅이다. 대견사 복원만큼이나 힘든 일이 될 터. 스님에게 대견사 복원의 심정을 여쭈었다.

“크게 보면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일이죠. 또 하나, 대견(大見)은 대소승을 막론하고 불교를 관통하는 팔정도의 정견(正見)을 의미합니다. ‘작게 보는 것’이 아니라 ‘크게 보는 것’이죠. 작은 물줄기지만 새로운 불교 흐름을 만들지 않을까요?”

일연 스님이 이곳 보당암에서 10년 넘게 주석했는데, 당시는 몽골 침입기였다. 산 아래 곳곳이 전쟁터였다. “사람들이 참꽃 군락지로 많이들 피신했고, 일연 스님은 그들과 함께 10년을 보내면서 불교와 『삼국유사』를 고민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전한다.

“이곳에 있으면 낙동강으로 떨어지는 낙조가 훌륭합니다. 여러 선지식이 낙조를 보면서 깨침을 얻었다고 하죠.” 

성문 스님이 젊은 시절 여러 인연을 이야기하며 작은 웃음을 짓는다. 

 

대담. 류지호     
정리. 김남수     
사진. 유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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