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이 꿈꾼 삼국유사 비슬산] 비슬산을 벗어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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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이 꿈꾼 삼국유사 비슬산] 비슬산을 벗어나서
  • 조경철
  • 승인 2023.03.28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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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이 꿈꾼 나라
군위 인각사에 모셔진 일연 스님 영정. 사진 정승채

 

삼국유사

『삼국유사』의 가장 큰 특징은 고조선의 단군신화가 실려 있다는 것이다. 단군신화는 오래전부터 구전이나 기록을 통해서 전해져 왔지만 현재 알려진 가장 오래된 책이 『삼국유사』다. 맨 앞에 ‘고조선’ 이야기를 싣고 있는데, 우리 역사의 출발이 고조선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단군신화를 통해 단군이 나라를 세우는 신성한 과정도 덧붙였다. 일연 스님은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연대가 자기가 살던 때로부터 3,500년 전이라고 했다. 중국이 성군으로 떠받드는 요임금과 같은 시대다. 중국과 견주어도 꿀릴 게 없다고 본 것이다. 

일연 스님은 왜 이처럼 고조선과 단군을 강조하고 자랑하고 싶었을까. 일연 스님이 살았던 시대와 관련이 깊다. 몽골이 수십 년에 걸쳐 고려로 침입하고 있었을 때다. 스님은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이 나라는 아주 오래전 고조선부터 이어져 왔다는 민족성을 강조했다. 몽골에 대항하는 저항정신을 북돋고자 했을 것이다.

사실 일연 스님은 이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렸다. 시대가 변해가고 있었다. 중국이 송나라에서 원나라로 바뀌어 갔다. 한족의 송나라가 이민족인 원나라에 무너져가고 있었다. 고려가 떠받들던 송나라가 설마 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그 당시 벌어지고 있었다. 일연 스님은 우리 역사를 돌아봤다. 세상을 바라보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당당히 우리 역사도 중국 역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자각한 것이다. 그래서 단군이 세운 고조선의 건국을 중국 요임금과 같은 때라고 본 것이다. 『삼국유사』는 단순히 몽골에 저항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고려가 겪은 비슷한 일이 조선에도 일어났다. 한족의 명나라가 저물고 여진족의 청나라가 뜨고 있었다. 조선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을 명나라에 가뒀다. 병자호란을 겪고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나중에 일본과 서구 열강들이 들이닥칠 때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으로 작용했다.

일연 스님은 몽골 침략기도 겪었고 원나라 간섭기도 겪었다.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스님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때 나이가 31세였다. 일연 스님은 비슬산으로 들어갔다. ‘문수오자주’를 염하면서 몸을 숨기기 좋은 곳을 빌었다. 산에서 마음을 다해 선관을 닦으며 ‘심존선관(心存禪觀)’을 공부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윤휴와 이승휴는 달랐다. 김윤후 스님은 용인 처인성에서 적장 살례탑을 살해했고 또 다른 단군신화를 실은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는 삼척 요전산성에서 몽골군과 직접 싸우기도 했다.

어쩌면 김윤휴, 이승휴와 다른 행보를 보인 일연 스님에게 실망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승려가 갈 수 있는 길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당시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당시 승려의 역할은 국가에서부터 한 개인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했다. 

 

일연 스님의 시대

일연 스님은 비슬산에서 14년 생활을 마치고, 비슬산에서 8년을 더 머물렀지만, 44세 때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무인정권의 최고 실력자 최이의 처남인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 정림사에 주석했다. 그리고 정치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일연 스님이 비슬산에서 깨달은 것은 ‘생계불감 불계부증(生界不減 佛界不增)’이었다. 세상과 부처님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은 곧 부처님 나라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처해도 거리낄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살이는 일연 스님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정안이 죽은 후 56세까지 윤산의 길상암 등 남해 주변에 머물며 『중편조동오위』 등을 편수했다. 이후 강도(江都, 강화)의 선월사, 지방의 오어사, 인홍사(인흥사), 운해사, 운문사 등 정권의 향배에 따라 중앙무대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지방에 머물기도 했다. 

일연 스님이 본격적으로 중앙무대에 뛰어든 것은 여몽연합군이 일본 동정에 나갈 때다. 원간섭기 고려의 입장에서는 몽골의 일본 동정 요구를 거절할 형편이 아니었다. 1281년 일본 정벌을 위해 경주에 내려온 충렬왕은 운문사에 주석하고 있던 76세의 일연 스님을 불렀다. 전쟁 준비로 어려워진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는 일을 맡겼을 것이다. 

당시 고려 관리들은 일본 동정을 핑계로 백성들을 더 수탈하고 승려들도 승직을 파고 사는 일이 빈번할 정도로 어려웠다. 충지 스님은 전함 제조와 군량 조달을 괴로워하는 백성들의 처지를 글로 남기기도 했다. 백성도 중요하고 그렇다고 전쟁 준비를 안 할 수도 없는 원망스러운 시대였다. 

일본 동정은 1274년에도 있었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일연 스님은 충렬왕과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일본 동정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283년 3월 원나라로부터는 강남의 군대를 동원해 8월에 일본을 정벌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고려는 각도에 사신을 보내어 군량을 준비하고 병기를 제작하고 전함을 수리 건조하도록 했다. 이즈음 충렬왕은 일연 스님을 가장 높은 국존에 임명했는데, 다행히 5월에 일본 정벌계획은 취소됐다. 

이제야 스님도 쉴 수 있었다. 78세의 일연 스님은 95세의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러 길을 떠났다. 시대가 그를 너무 오랫동안 잡아두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바로 다음 해 1284년 9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스님은 인각사에 5년 동안 머물다 84세로 입적했다.

일연 스님은 인각사에 머무는 동안 그동안 모아두었던 자료를 정리하며 『삼국유사』를 편찬했다. 그 이전에는 여가가 나지 않아 미처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자신과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뒤돌아보고, 자신이 꿈꾸는 나라를 책에 담았다.

『삼국유사』에 실린 「고조선」조. 사진 서울대 규정각한국학연구원 

 

일연 스님의 고(古)조선

일연 스님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국가를 조선이라고 생각했다. 일연 스님은 ‘고’를 붙여 고조선이라고 했다. 이성계의 조선보다 앞서서 ‘고’를 붙인 것이 아니고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보다 앞서서 ‘고’를 붙인 것이다. 그런데 나라 이름이 같은 경우,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전·후’나 ‘동·서·남·북’을 붙이지 ‘고’를 붙이진 않는다. ‘고’를 붙인 사례는 고조선이 유일하다. 일연 스님은 왜 ‘고’를 붙였을까. ‘고(古)’에는 오래됐다는 뜻도 있지만 ‘상고주의(尙古主義)’나 ‘고전(古典)’ 등의 예례에서 보듯, 가장 이상적이거나 가장 뛰어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연 스님에게 고조선은 가장 오랜 국가이기도 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국가였다. 

일연 스님은 고조선을 어떤 측면에서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보았을까. 환인의 아들 환웅이 낳은 단군이 세운 나라, 곧 하느님(환인)이 세운 나라여서 그랬을까. 일연 스님은 환인(桓因)을 제석(帝釋)으로 풀었다. 제석은 불교의 천신으로 인간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수미산 꼭대기 천신의 이름이다. 일연 스님은 ‘의도적으로’ 환인을 제석과 같은 뜻인 석제환인의 줄임말로 보았다. 그런데 실은 석제환인을 환인으로 줄일 수는 없다. 해인사 고려대장경에는 1,000번 이상 석제환인이 등장한다. 당연히 석제환인을 줄인 환인도 적어도 수백 번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환인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범어 조어법상 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제 저항기 때 일인 학자들은 ‘환인’을 강조하면서 단군신화가 불교식으로 윤색됐다고 했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일연 스님이 달아 놓은 ‘제석’이란 설명에 근거한 것 같다. 일연 스님은 의도적으로 환인을 제석으로 풀면서 제석의 후손이 다스리는 고조선이 가장 이상적인 국가임을 강조했을 뿐이다.

제석의 고조선은 고조선으로 끝나지 않았다.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의 역대 왕들의 왕계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삼국유사』 「왕력」에는 ‘고구려 동명왕’이 아닌 ‘고려 동명왕’이라고 했다. 덧붙여 동명왕은 단군의 아들이라고 했다. 궁예가 세운 나라도 고려라고 했다. 왕건이 세운 나라도 고려다. 고구려는 4~5세기에  나라 이름을 고려로 바꾸었다. 그래서 「왕력」에는 고구려나 고려 가운데 고려로 통칭한 것이다. 제석의 손자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단군의 아들 동명왕의 고려로 이어지고 궁예의 고려, 왕건의 고려를 거치면서 일연 스님이 살았던 13세기까지 이어진다. 대한민국의 영문 국호로 ‘코리아(Korea)’를 쓰고 있으니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일연 스님은 생계(生界)와 불계(佛界)를 구분하지 않았다. 간화선과 문자선과 묵조선을 구분하지 않고 묵조선 계열의 『중편조동오위』를 편찬했다. 가지산문에 속하면서 수선사 계열의 선월사에 주석했다. 대장경을 읽으며 유교나 제자백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일연 스님은 송나라에서 원나라로 세계의 중심이 바뀌는 시대적 격변기에 저항정신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통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에 대한 답이 『삼국유사』였다. 그 출발이 고조선이다. 일연 스님에게 구도와 정치는 별개가 아니었다.  

 

조경철
연세대 사학과 객원교수, 한국사상사학회 회장.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연세대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2013년 한국연구재단이 조사한 한국사 분야 학술지 인용지수 2위를 차지했다. 저서로는 『백제불교사연구』, 『나만의 한국사』 등이 있으며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려고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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