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 스님은 비슬산에서 두 차례에 걸쳐 37년 머물렀다. 80년 넘는 인생 중 거의 반을 비슬산에서 보냈다. 태어난 곳이 비슬산 바로 옆 경산이고, 입적한 곳이 비슬산 북쪽 군위 인각사다. 비슬산은 일연 스님의 생애를 관통하고 있다. 그렇기에 『삼국유사』와 비슬산은 어떤 식으로든 직접적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스님의 시대는 전쟁의 시대다. 승과(僧科) 합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토는 몽골군의 말발굽에 시달렸다. 대구 부인사에 봉안됐던 초조대장경이 불타고, 경주는 불바다가 됐다. 스님은 그즈음 비슬산을 내려왔다. 스님이 향한 곳은 남해를 지나 강화와 개성이었다. 강화와 개성은 왕이 있던 곳이다. 얼마 후 30년 넘는 전쟁은 끝났으나, 고려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스님은 환갑이 될 무렵 다시 비슬산으로 돌아왔다. 우리에게 남겨진 『삼국유사』가 이즈음 스님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 잡지 않았을까?
『삼국유사』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메말랐을 것이다. 스님의 손길이 스쳐간 후에야 냇가와 산봉우리는 신화가 됐고, 민초의 삶은 역사가 됐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남긴 스님의 자취는 초라하기만 하다. 스님이 머문 사찰은 석탑만 남기고 빈터가 됐고, 양반가의 집터로 변했다. 부도는 자리를 잡지 못했고, 비는 조각만 남았다.
자취를 감춘 일연 스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비슬산이다. 풍부한 역사를 만들었지만, 본인의 자취는 남기지 않은 스님을 만나러 비슬산으로 가보자.
일러두기
① 일연 스님의 저술인 『삼국유사』의 찬술 시기와 장소는 불명확합니다. 본문에서는 저자들의 다양한 시각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② 인각사에 모셔진 일연 스님 비의 명칭은 「보각국존비(普覺國尊碑)」로 통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