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에
머물다
비슬산은 언제나 ‘핫’하다. 산세가 워낙 특이하고 유서 깊은 사찰과 문화유적들이 곳곳에 있다 보니 일 년 내내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해발 1,000m 대견봉 정상에서 펼쳐지는 4월의 참꽃 군락은 몽환적이다. 여름에는 풍부한 물줄기와 폭포가 수시로 이내(안개)를 피워올리고, 얼핏 지나는 바람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기묘한 바위와 암벽, 가파르게 쏟아진 너덜(암괴류)은 태고의 신비감마저 자아낸다.
봄꽃보다 화려한 비슬산의 단풍 속에는 머루와 다래, 으름이 보석처럼 달려 있고, 겨우살이를 준비하는 다람쥐의 눈망울이 영특하다. 코끝 쨍한 겨울의 냉기 속에 수정 같은 상고대가 화려하게 피어나고, 골짜기마다 쭉쭉 뻗은 소나무와 신우대는 더욱 푸르르다. 보각국사 일연(普覺國師 一然, 1206~1289) 스님이 71년간의 승려 생활 중 절반인 37년여를 비슬산에서 보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보당암에서의 10년
고려시대 문신인 민지(閔漬, 1248~1326)가 지은 「보각국존비(普覺國尊碑)」에 따르면, 일연 스님은 1206년 6월 경주 장산(현 경남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 이름은 견명(見明), 호는 목암(睦庵), 모친은 이씨다. 9세에 광주 무등산 무량사(無量寺)로 가 5년간 수학했고, 14세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도의선사 탑비에 참배한 후, 대웅(大雄) 장로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타고난 총기를 바탕으로 부지런히 공부했기에 수행과 학덕이 구산사선(九山四選)의 으뜸으로 추거됐고, 22세에 승과의 상상과(上上科)에 장원 급제했다. 그 후 일연 스님은 초임지인 포산(包山, 비슬산) 대견봉 보당암(寶幢庵)에서 약 10년간 수행 정진했다. 하늘과 맞닿은 대견봉 정상 남쪽에 위치한 보당암은 비슬산의 상징이었다. ‘불보살을 장엄하는 깃발’이라는 뜻의 보당(寶幢)은 불연 깊은 비슬산 전체를 표시하는 깃발인 것이다. 태장계만다라에서 보당여래(Ratnaketu)는 여의보주(如意寶珠)의 기인(旗印)을 가진 존재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붓다를 말한다. 그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고, 여원인을 결(結)하고 연화좌에 앉아 있다. 이 보당여래의 공능은 불도수행의 근본인 보리심을 기인으로 하여 수행을 방해하는 나쁜 무리를 쫓아내는 것인데, 바로 비슬산에서 보당암과 3층 석탑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비슬산의 풍부한 생태계는 온 생명을 살리고, 계절마다 연출되는 신령스러운 비슬산의 풍경은 수행자를 더욱 수행자답게 만드나 보다. 불교가 국교인 고려시대에, 더구나 상상과에 급제한 일연 스님을, 비슬산의 무엇이 그토록 오래 붙잡았을까? 22세에 시작된 일연 스님의 비슬산 생활은 청년기를 지나 장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31년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했다. 왕실은 강화도로 옮겨졌고, 1235년에는 동경(경주)까지 유린당했다. 일연 스님은 10년간의 보당암 생활을 정리했다. 수행자로서는 보당암이 최적의 수행지였겠지만, 전쟁으로 고통받는 국가와 민초들을 위해서는 산 아래로 내려와 자신의 시대적 책무를 담당하고자 한 게 이유였을 것이다.
일연 스님은 새로운 곳에서 감응을 얻고자 ‘문수오자주(文殊五字呪)’인 ‘아라파차나(阿羅婆遮那)’를 외웠고, 1236년에 산 아래쪽의 무주암(無住庵), 묘문암(妙門庵)으로 옮겼다. 그해에 삼중대사가 됐고 남해로 가기까지 12년을 더 머물렀다.
비슬산의 신비롭고 특이한 산세, 정상에 위치한 보당암은 호연지기를 기르기에 맞춤이었다. 울창한 숲과 조화로운 생태계가 주는 평화, 너덜과 이내의 신비감, 봄마다 벌어지는 참꽃 군락의 대향연! 그 속에서 일연 스님의 생활은 무척 치열했을 것이다. 그가 전도양양한 학승이었음에도, 중앙권력과 관련해 22년간이나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것은, 비슬산을 터전 삼아 주로 수행과 학문에만 힘썼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국가 안위가 위태로운 격변기였기에 일연 스님은 수행은 물론, 국난을 극복하고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삼국유사』 편찬을 위한 자료 수집과 연구로 짐작된다.
일연 스님은 정사인 『삼국사기』에 우리 민족의 시원인 단군이나 가락국기 등에 대한 서술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 무엇보다도 불교 전래와 원효·의상 등의 걸출한 스님과 명찰의 인연담 등 불교문화에 대해 서술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역사서나 경전, 고승전, 지방지 등을 찾아보았고, 그것들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기본 자료가 됐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보당암과 대견사
일연 스님이 10년여 주석했던 보당암은 비슬산의 특이한 지형을 반영해 정상부에 창건됐다. 불교가 전통적인 산악신앙을 흡수해 국난 극복을 위한 호국불교의 성격으로 무장하고 창건된 것이다. 비슬산 보당암은 암자 이름이나 마애불로 보아 밀교와도 관련이 깊으며, 일연 스님을 매개로 선종이나 유가종과도 연결된다. 조선시대에는 이첨(李詹)에 의한 관음신앙이 그 뒤를 이었으며, 지역민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어머니로서 그 역할을 다하며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보당암 창건과 관련해 신라 헌덕왕(재위 809〜825)과 당 문종(재위 827〜840)의 두 가지 설이 전한다. 헌덕왕 창건설에 의하면 보당암은 왕실 사찰인 동시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비보(裨補)사찰로서의 역할도 했다. 대견사(보당암) 상량문에서 ‘산세가 대마도를 끌어당기는 형세이므로 이 절을 창건해 진압했다’는 내용이 전하기 때문이다. 문종 창건설에서는 문종이 세숫대야의 물을 통해 엿본 아름다운 터에 절을 짓고 대견사라 했다고 한다. 이 설은 뚜렷한 근거 없이 구전돼온 것으로, 보당암 터인 대견봉의 수승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문종은 827년에 즉위했기에 헌덕왕 창건설보다 연대가 약간 뒤진다.
그 후 폐허가 된 보당암은 여말선초에 대견사(大見寺)로 중창됐다. 보당암과 대견사와의 관계는 이첨이 1402년에 쓴 「보당암중창법화삼매참소」(『동문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첨은 보당암을 대대적으로 중창한 후 법화예참(法華禮懺) 법회를 열었다. 그는 ‘큰 산 비슬 정상에 보당암의 유지가 남아 있으나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비바람에 난간이 꺾이고 기왓장이 깨어지는 등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며 당시의 상황과 함께 두 사찰의 인연을 알려준다. 이때 사찰명이 대견사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한다.
대견봉 폐사지에서 출토된 암막새의 ‘辛亥五月○’명, ‘大見寺’ 등의 명문은 일연 스님이 10년간 주석한 보당암이 여말선초(1371 혹은 1431)에 대견사로 중창된 인연을 다시 한번 알려준다. 또한 『동국여지승람』(1481), 『신동국여지승람』(1530)의 「현풍현 불우」조에서도 대견사가 비슬산 남쪽 모퉁이에 있으며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후 대견사는 임란 당시의 폐사와 이후 몇 차례의 중창을 거치며 그 성격에 다소 변화가 생겨, 불교를 넘어 기우제 등 민초들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는 성황사(城隍祠,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신을 모시는 당) 역할도 했다.
『현풍현읍지』(1871), 「불우」조에서도 “대견사는 비슬산 아래 남쪽 모퉁이에 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신라 헌덕왕이 창건한 것으로 9층 석탑이 있다. 만력 임진년(1592) 사우가 기울고 무너졌다. 상량문 1책을 얻었는데, 산세가 대마도를 끌어당기는 형세이므로 이 절을 창건해 진압했다”며 대견사가 보당암 자리에 중건됐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1900년에는 영친왕의 즉위를 축원하기 위해 대견사에 위축(位祝)이 신설되며 황실사찰의 하나가 됐다. 그러나 대마도를 끌어당긴다는 전설 때문인지 191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됐다가 근래에 복원됐다.
대견사의 유물로는 3층 석탑과 연화대좌, 석축과 우물, 밀교와 관련 있어 보이는 마애불 등이 있다. 대견사지 3층 석탑(대구시 유형문화재)은 1988년에 복원된 것으로 나말여초의 양식으로 보인다. 또 그 위치로 보아 보당암 창건 설화와 같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산천 비보사상을 바탕으로 조성됐음을 알 수 있다. 즉 비슬산 불국토를 의인화하여 그 ‘불보살을 장엄하는 깃발’, 즉 보당(寶幢)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편 『현풍현읍지』에서는 9층 석탑이 있었다고 기록하지만, 지금의 3층 석탑에서는 옛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
『조선왕조실록』 1416년(태종 16)과 1423년(세종 5)에 수록된 “경상도 현풍현 비슬산 대견사의 석상인 장육관음상이 땀을 흘렸다”는 기사를 통해 비슬산의 성산으로서의 격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불상은 물론 나무나 바위 같은 여러 자연물이 국가의 위기 상황을 미리 알려주는 전조는 각종 기록에서 그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비슬산의 장육상이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발굴 조사를 통해 대견사 터 중심 건물로 추정되는 곳에서 정방형의 석조연화불상대좌가 확인됐다. 이 대좌에 장육관음보살좌상(丈六觀音菩薩坐像)이 봉안된 것으로 보이며, 입상보다는 좌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장 6척의 거대한 장육상은 이첨이 보당암을 중창하면서 『법화경』 제25품인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바탕으로 조성한 관음상이다. 그 좌향은 현풍읍 방향의 법당과 달리, 창녕을 넘어 저 멀리 남해를 바라보는 방향이라,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비보사찰로 창건됐다는 설화에 부합된다.
두 번째 만남
일연 스님은 44세(1249)에 22년간의 비슬산 생활을 접고 남해로 떠났다. 정안(鄭晏)의 초청으로 남해 정림사의 남해분사대장도감으로 옮겨 대장경 조성을 주관했다. 54세에 대선사가 됐고, 56세에 왕명으로 개경 선월사(禪月社) 주지가 되어 목우화상 보조 지눌 스님의 법을 이었다.
일연 스님은 59세에 왕에게 청하여 영일 오어사(五魚寺)로 갔다가 비슬산으로 돌아와 인홍사(仁弘寺)에 주석했다. 비슬산을 떠난 지 15년 만의 귀환이었다. 44세에 비슬산을 떠났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마무리하고 59세의 중후한 나이에 이 산으로 돌아와 다시 13년을 더 머물렀다. 초임지인 보당암은 아니었지만 비슬산은 일연 스님에게는 고향 같은 곳으로, 그는 이 기간에도 다양한 활동을 했다. 59세에 다시 시작된 비슬산 생활에서 76세까지, 일연 스님의 비슬산 사랑은 한결같았다. 스님은 1차(22~44세), 2차(59~72세)에 걸쳐 37년을 비슬산에 주석했는데, 1차로 머문 22년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가 그에게는 가장 치열하게 수행하고 학문을 닦은 기간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특히 『삼국유사』 찬술을 위한 참고 자료를 모으고자 일연 스님은 끊임없이 비슬산을 오르내리며 편제를 구상하고 사료를 수집, 정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민족의 보고인 『삼국유사』는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락국의 역사, 문화, 종교, 민속 등에 관한 종합적인 역사서다. 이렇게 방대하고 다양한 내용을 엮기 위해서는 자료 수집과 내용 정리, 인접 학문과의 비교가 필수적이다.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각 편에 맞게 내용을 구성하고 문장을 쓰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물론 일연 스님이 72세부터 모친이 사망한 79세까지 운문사에 머물긴 했지만, 그때는 국사(國師)의 자격으로 두 차례의 구산문도회를 개최하는 등, 고승으로서의 크고 작은 중책을 끊임없이 수행하고 있었다. 또한 연로했기에 그곳에서 방대한 분량의 『삼국유사』를 모두 집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인각사로 이석한 79세부터는 이미 너무 고령이라 새로 『삼국유사』를 찬술하기는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삼국유사』 편찬은 일연 스님 일생의 대업으로, 다양한 내용이나 방대한 분량으로 보아 결코 단기간 내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일연 스님은 71년의 승려 생활 중 37년간을 포산에서 주석하며 많은 불교 서적을 찬술했다. 44~59세, 72세 이후 등 스님이 포산을 떠나 있던 시기는 대장경 조성이나 왕의 요청 혹은 국사로서의 활동 등의 이유가 있었기에, 『삼국유사』 찬술을 위한 기본 작업은 포산에서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일연 스님은 1289년 7월 8일 입적하기까지, 84년 생애 중 37년을 비슬산에 머물렀다. 수행자에게 있어 불연 깊은 비슬산은 처처가 부처님 도량이고 곳곳이 설법처였다.
사진. 유동영
계미향
「한국고대의 천축구법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겸임교수, 동국대 불교학술원을 거쳐 현재 선리연구원 상임연구원으로 있다. 천축구법승과 중국구법승 등 고대 스님들의 대외 교류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으며, 저서로 『고려 충선왕의 생애와 불교』, 『한국 고대의 천축구법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