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시작과 끝, 경주 남산] 골골[谷谷]마다 바위 기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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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시작과 끝, 경주 남산] 골골[谷谷]마다 바위 기도처
  • 노승대
  • 승인 2022.04.2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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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의 기도와 염원 남산 바위를 수놓다
경주 석장동 암각화

서울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산(목멱산)이라 부르듯이 경주에도 남산이 있다. 경주 남산은 경주 시내에서 가장 가깝고 웅장한 바위산이다. 본래 이름은 금오산(金鰲山)이라 부른다. 금빛 거북이가 엎드린 형국의 산이라는 뜻으로 거북이나 자라 이름이 들어간 산은 예로부터 신성한 기도처로서 

받아들여졌다. 김해 구지봉이 그러하고, 국사봉도 구수봉(龜首峰)이 음운변화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경주 남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다. 길이가 8km, 동서의 너비 4km이며 북쪽에는 금오봉(468m), 남쪽에는 고위봉(494m)이 높이 솟았다. 남산 자락에는 신라의 흥망성쇠를 상징하는 유적들이 함께 남아있다.

 

신라, 남산에서 출발하다

신라 이전 경주 일대에는 6개의 씨족 집단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를 보통 6부촌(六部村)이라 불렀다. 6개의 씨족 집단을 이끄는 우두머리 수장(首長)들은 기원전 69년 3월 1일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 임금을 추대한 뒤 나라를 세울 것을 결정하고 높은 곳에 함께 올랐다. 그런데 양산(陽山) 아래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어 가보니, 백마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 자리에는 붉은색의 큰 알만 남아있었는데 알 안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상히 여겨 동천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 짐승들이 춤추듯 노닐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세상을 밝게 한다고 하여 혁거세(赫居世)라 이름 짓고 알이 박과 같이 생겼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했다.

아이가 열세 살 되던 해 6부촌장이 다시 모여 여섯 촌을 합해 나라를 세우고 그 아이를 받들어 왕으로 삼았다. 기원전 57년의 일이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했으나 세간에서는 사로(斯盧)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곧 박혁거세가 왕위에 오르며 세운 나라가 사로국이며, 부족 연맹체 국가였던 진한(辰韓)의 맹주국(우두머리 국가)이었다. 진한은 12개 소국이 소속돼 있었는데 사로국은 차츰 세력을 확장해 신라로 성장하게 된다.

박혁거세가 처음 거주하던 궁궐은 남산의 서쪽 창림사터에 있었다. 나정에서 약 1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3대 유리왕 때에는 6부촌에 각각 성씨를 내려줬으니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이, 최, 손, 정, 배, 설 씨가 탄생하게 된다. 원효대사가 바로 설 씨의 후손이며 최치원이 경주 최씨의 후손이다.

남산의 바위신앙

사람과 동물이 다른 점은 선사시대부터 무언가 종교 행위를 하고 기도하고 빈다는 사실이다.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하는 수렵, 채취 문화에서 농경과 목축의 정착 문화가 자리 잡자 비를 빌어야 했고 자손을 빌어야 했고 질병 퇴치를 빌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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