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로 향하는 보살(싯다르타)을 본 욕계의 마왕 파순은 네 종류의 정예 군사(야차)들을 꾸려 갑옷을 입히고 칼을 들렸다. 용맹스러운 장수가 갖가지 무서운 군사들을 거느린 것 같아서 보는 사람의 털이 곤두설 지경이며 세상에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던 것이었다. 이렇게 한량없는 천신과 귀신 병정들은 모두 화살, 창, 철퇴, 도끼, 탈 등 가장 우수한 금강의 병기들을 쥐었다.
출두 명령을 기다리던 군사 중 얼마의 무리는 보리수가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엎드려 있었다. 군사들은 멀리서 보살이 보리수 아래로 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마치 금산처럼 빛나는 것이 가히 비유할 수가 없었다. 군사들은 모두 보리수 곁에서 별이 흩어지듯 달아났다.
상황을 보고한 군사에게 마왕 파순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 이제 오직 갖가지 방편으로 마음을 써서 그를 거절하여 이 자리에 앉지 못하게 하리라.”
파순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본 보살은 풀 자리 위에 앉아 마음속으로 이런 원을 세웠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앉으신 금강 자리에 앉았으니 마땅히 마왕 파순이 항복하게 하리라. 이제 여기 앉아 애욕·진에·우치 등 모든 번뇌를 끊으리라. 내 이제 여기 앉아 미묘한 감로, 청량한 법을 깨달아 얻으리라.”
보살은 거듭 생각했고 맹세했다.
“세간 경계는 모두 무상하고 더럽고 깨끗하지 못한 것이라 잠깐 잠깐에 나고 꺼지고 잠시도 머묾이 없다. 생각하면 일체가 다 파괴되는 법이요, 나서는 곧 멸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문득 욕심을 끊고 출가할 마음을 내었으며 투쟁하는 마음을 쉬고 자민(慈愍, 사랑하여 불쌍히 여김)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며 살해하는 마음을 끊고 비애 하는 마음을 냈다. 이런 일은 내뱉어 버린 지 오래다. 성도하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파순은 마음속으로 크게 두려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찰제리 석가족 아들은 나의 경계를 없애버리고 나를 이 경계에서 나가게 하리라. 만약 그가 나를 이겨 나보다 앞서면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열반을 얻게 하고, 그들을 위해 열반의 방편을 말할 것이다. 그러면 경계는 허공이 되고 말 것이다. 그가 아직은 청정한 눈을 이루지 못하고 나의 경계에 있으니 지금 힘써 방편을 지어 그의 수행이 퇴보하고 상실돼 달아나게 하리라.”
__ 『불본행집경』 「향보리수품」 「마포보살품」 각색
관계 혐오와 혐오 관계
“이제 다 좀 지긋지긋해요. 저는 결혼할 마음도 없고, 아이를 가지고픈 마음도 없어요. 친구들도 만나면 다 주식과 코인 이야기나 직장 이야기만 하다가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부모님도 당신들 때와는 정말 다른 각박한 현실에서 제가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사정은 알지도 못하면서 압박만 하시고, 애인 만드는 일도 성가시고, 이젠 관계가 다 귀찮아요. 그냥 혼자 살면서 제 취미활동 즐기며 여가를 잘 보내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집 사는 일 같은 건 불가능한데 소확행이라도 누려야죠. 누가 제 삶 책임져줄 것도 아니면서, 자기 편의대로 이래라저래라하는 말들이 이젠 정말 듣기도 싫어요. 관계들이 솔직히 염증 나요. 이런 제가 이상한 걸까요?”
관계 자체에 대한 ‘관계 혐오’다. 그리고 이 관계 혐오를 느끼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관계 자체에 애초 혐오의 속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문제다.” “여자가 문제다.”
“보수가 문제다.” “진보가 문제다.”
“기성세대가 문제다.” “젊은이들이 문제다.”
오늘날 펼쳐지는 이 관계들의 대립구조가 알리는 것은 일반적인 갈등을 넘어선 혐오다. 이 관계들은 모두 혐오 관계들이다. 이처럼 관계라는 것이 노골적인 혐오 관계로 드러나고 있기에, 우리는 관계에 지친다. 관계 자체를 거부하게 되며, 나아가 혐오하게 된다. 혐오 관계가 관계 혐오로 이어지는 것이다.
혐오는 아주 강한 미움이다. 바로 증(憎)이다. 증은 관계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한 축이며, 관계가 드러내는 현실이 바로 애증(愛憎)이다. 혐오는 관계 자체가 내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모든 관계는 실제적인 내용의 차원에서 애증을 담고 있다. 관계는 형식이며 그 내용이 애증이다. 그리고 내용은 그 내용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관계 혐오이자 혐오 관계로 그 내용을 알리는 증은 대체 어떠한 의도가 있을까?
죽음 망각과 실존 망각
마왕 파순은 군세를 통해 싯다르타 태자를 두렵게 만들고자 한다. 곧, 싯다르타 태자를 적대하여 공격하려고 한다. 싯다르타 태자가 두렵기 때문이다. 여기에 증이 작동하는 동기가 있다. 우리가 어떠한 대상을 적으로 보며 미워하게 되는 이유는 그 대상이 두렵기 때문이다.
무엇이 두려울까? 자기를 죽일까 봐 두렵다. 이는 실상 그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큰 만큼,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크기가 정확히 대상에 대한 미움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하지만 미움이 클수록 죽음의 두려움은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미움이 두려움을 이기는 혹은 이길 수 있는 해결책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착각이 눈을 뜬다. 미움이 죽음에 대한 해결책처럼 상정된 까닭에 ‘적을 만들어 증오하며 싸우는 동안에는 죽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다. 혐오를 지속하는 동안에는 죽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고, 증의 의도를 지속하는 동안에는 죽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며, 그 증의 형식인 관계를 지속하는 동안에는 죽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다. 이 착각은 증이 실현하고자 하는 실제적인 의도이기도 하다.
관계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이 착각으로 인해, 우리는 증의 감정을 통해 더 많은 혐오의 관계를 끌어들인다. 주변에 적을 많이 만들고 뜨거운 혈기로 더 많은 적과 싸우면 싸울수록 자신이 죽음으로부터 더 안전해질 수 있으리라 믿는 모순적 상황을 만들게 된다.
이 모순을 눈치챈 이들은 관계 자체의 혐오로 이행, 뜨거운 혈기를 차가운 냉소로 바꾼다. 그러나 냉랭하게 고립된 까닭에 자신은 죽음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함을 경험한다. 뜨거운 혐오 관계를 지속해도, 차가운 관계 혐오로 이행해도, 관계에 대한 논리를 통해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관계로는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는 이 사실. 싯다르타 태자가 보리수에 앉아 마왕 파순 앞에서 드러내려고 했던 실제다. 파순은 이렇게 말한다.
“이 찰제리 석가족 아들은 나의 경계를 없애버리고 나를 이 경계에서 나가게 하리라. 만약 그가 나를 이겨 나보다 앞서면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열반을 얻게 하고, 그들을 위해 열반의 방편을 말할 것이다. 그러면 경계는 허공이 되고 말 것이다.”
‘경계’라는 표현을 ‘관계’로 다시 읽으면 그 뜻이 더욱 명확하다. 경계가 곧 관계다. 파순은 자기가 두려움과 증오의 군세로 지배하는 이 관계라는 영토가, 싯다르타 태자로 말미암아 허공과도 같은 환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관계라는 허상이 사라지면 파순은 죽음을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까닭이다.
죽음을 직면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은 싸워야 할 혐오스러운 대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지만, 오히려 죽음의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게 한다. 이게 현실이다. 이 현실은 관계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한다. 착각은 망각을 위한 발명품이며, 관계는 죽음을 망각하기 위한 기제다.
이 죽음 망각이 오늘날 혐오 관계와 관계 혐오의 문제를 낳는 핵심적인 이유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끝없이 마녀를 창조해내 우리와의 관계로 끌어들여 혐오를 반복하는 구조이자 악순환이다. 이렇게 죽음을 망각하려는 동안, 우리가 실제 망각하는 것은 바로 삶이다. 죽음 망각은 곧 실존 망각이다. 죽음을 망각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정말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다. 공허하고 의욕이 없다. 오히려 어떤 것을 혐오하고 적대할 때만 자극을 느끼고 활력이 생긴다. 파순처럼 정복해야 할 소비의 대상들을 찾아 그 정복의 자극에만 몸을 맡긴다.
이것은 실존철학자들이 공통으로 진단했던 현대인들의 징후다. 관계라는 것에 더는 자신을 의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자신 스스로 죽음의 문제와 독대해야 하는 운명 앞에 놓인 현대인들의 반응양식이다. 이 곤궁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전할 간절한 메시지를 위해 붓다는 2,500년을 예비해왔다.
미워할 자유로 함께 자비함
싯다르타 태자가 보리수에 홀로 앉아 있던 태도가 바로 실존적 태도다. 그것은 태자의 서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홀로 죽겠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 단독자로 있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을 가장 긍정하는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이 바로 삶을 가장 긍정하는 모습이다.
삶의 핵심은 정직성이다. 삶을 가장 긍정하는 이는 이 정직성으로 산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미운 것은 미운 것이다. 정직한 이는 밉게 느껴지는 것을 미워한다. 가장 근본적인 정직성 위에서 미워한다. 우리가 죽는다는 정직한 사실 위에서 미워한다. 이제 죽게 될 것을 죽게 될 것으로 정직하게 보며 미워한다.
정직한 이는 미움을 경험함으로써, 미움이 연유한 두려움을 경험하며, 두려움이 연유한 죽음에의 예감을 경험한다. 그렇게 미움이 발생하고 있는 이 관계 속의 대상이 얼마나 죽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인지를 경험한다. 악에 받쳐 증오하고 있는 그 서러움을 함께 경험한다. 그렇게 미움의 관계에 놓인 그 대상이 얼마나 살고 싶은지를, 얼마나 그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 전하게 된다.
“미운 당신은 꼭 살아야 합니다.”
그의 삶을 가장 긍정하게 된다. 그가 가장 소망하던 현실을 향한 말을 들려준다. 이로 인해, 그 대상은 안심하며 쉴 수 있게 된다.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며, 분주하게 증오하는 일을 하던 ‘증(憎)의 사업’을 멈추고 비로소 쉴 수 있게 된다. 비로소 그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미움이 사실 자비의 다른 이름이었다.
자비는 쉼을 허용하는 것이다. 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쉼이 바로 죽음이다. 그래서 자비는 죽음을 허용하는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가 보리수에 앉아 한 유일한 일은 쉬는 일이다. 자신에게 쉼을, 죽음을 허용한 일이다. 곧, 자신에게 자비한 일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허용한 이 자비로 말미암아, 인간을 향한 자비가 펼쳐졌다. 함께 자비함 속에서 인간이 쉴 수 있게 되었다. 그 쉼을 통해 인간이 삶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단독자로서 죽음을 받아들여 그 죽음을 관통함으로써 모두의 삶을 되살린 것이다. 인간이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끝없이 증오의 일만을 하며 고통받던 현실을 이제 비로소 인간이 자유롭게 쉴 수 있는 현실로 뒤집어낸 것이다.
자신에게 죽음을, 곧 쉼을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노예로부터 해방된 결정적 증거다. 노예는 스스로 쉴 수 없다. 관계에 묶여 두려움으로 자신의 족쇄를 더욱 강력하게 죄어낸다. 그러나 그 노예는 정직한 한 단독자의 쉼으로, 그 단독자의 쉼을 함께함으로, 이제 온전한 해방을 맞이했다. 이것이 2,500년 전부터 붓다가 오늘날의 우리를 위해 예비해온 가장 깊은 자비다.
임인구
마음과 시선 실존상담소 소장이자 서울불교대학원대학 불교 상담전공 초빙교수. 선불교의 현대적 적용으로서 상담을 꿈꾸는 불교 상담자, 실존상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