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태자가 가비라성 비야라문에서 처음 나올 때 자물쇠를 잡은 수문장도 있었으나 그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태자가 궁에서 나가는 때를 알지 못했다. 모든 야차신에게 홀리기도 하고 모든 하늘 사람의 신통력 때문에 가장 조심스럽게 파수를 보는 이들조차 깊은 잠에 빠져 사람이 나가는 줄을 몰랐다.
그때 욕계의 마왕 파순은 태자가 처음 출가할 때를 보고서 태자에게 공포를 주려고 신통력으로 모든 소리를 만들어냈다. 허공에 큰 우렛소리와 벽력 소리를 내고 또 큰 강물을 만들고 큰 돌을 급류에 구르게 했다. 또 태자 앞에 높고 험한 큰 벼랑이 있는 큰 산을 지어냈으며 또 사납게 타는 불덩이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정거천왕들이 신통력으로 그 큰 구름과 뇌성벽력의 모든 소리를 감추고 또 그 큰 산과 강물, 돌, 높고 험한 언덕이며 사나운 불을 다 나타나지 않게 했다. 그 마왕 파순을 한량없는 백천 유순 밖에 내던져 태자의 출가에 장애가 되지 못하게 했다.
(싯다르타) 태자는 성문에서 나와 바깥에 이르자 몸을 돌려 가비라성을 바라보면서 사자후를 내어 이렇게 외쳤다.
“나는 이제 차라리 스스로 이 몸을 던져 큰 바위 벼랑에 떨어지거나, 모든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마치거나, 먹고 마시지 못할지언정, 만약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중생들을 생사의 바다에서 해탈시키지 못하면 나는 마침내 가비라성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 『불본행집경』 「사궁출가품」
나 지금 떨고 있니?
“그래도 될까?”
상담에서의 많은 이야기가 담고 있는 물음을 함축하면 아마도 이러할 것이다. 자기 삶의 장면에서 “그래도 될까?”를 무수히 반복하며 어떻게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그 상황에서 끝내는 상담자를 찾기에 이른다. 답이 없는 이 물음의 언어를 몸의 작용으로 옮기면 그것은 분명하게 ‘떨림’이다.
떨릴 때 우리는 답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의 떨림은 기존에 정답처럼 갖고 있던 하나의 답을 포기한 상태라는 것이다. 답이 없기에 답을 구한다. 이것은 다시 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떨림이라고 하는 것은 안정되고 확실한 현실을 보장하는 것처럼 제공되던 남의 답을 내려놓고, 자신의 답을 찾으려고 하는 상태다. 자신의 답이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해진 상태다.
이러한 호소는 우리 주변에서 빈번하게 들려온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 제가 지금 하는 이게 사회적으로나 가족을 생각해도 맞는 길인데, 현재 나름대로 잘한다고 인정도 받고 있는데, 왜 저는 다른 게 하고 싶을까요? 제가 아직 철이 없고 세상을 몰라서 그런 걸까요. 사람이 자기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 없다는 건 저도 잘 아는데 제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요.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실망하실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워요. 부모님은 저 때문에 당신들의 인생을 희생해오셨는데, 저는 그 은혜를 갚기는커녕 오히려 더 걱정만 끼쳐드리려고 하고 있으니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부모님이 안 계신다면 그냥 부담 없이 혼자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끔은 이런 상황이 답답해서 화도 날 때가 있어요. 모두가 다 기분 상하지 않고 만족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떨리는 마음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아직 그 떨림의 의미가 명료하게 이해되지는 않은 마음이다. 다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이 떨리는 마음은 모든 이의 삶에서 가장 핵심적인 마음이다. 정말로 살고자 하는 이는 떨리는 마음을 반드시 체험하게 된다. 붓다도 늘 가득했던 마음이다. 그렇게 우리가 떨고 있을 때, 붓다도 우리와 함께 떨고 있었다.
두려움이 만드는 꿈의 낙원
싯다르타가 출가를 감행했을 때 하늘에서 들려오던 큰 우렛소리는 무엇을 의미할까? 크게 혼날 것 같은 두려움이다. 떨림은 먼저 두려움으로 알려진다. 사나운 급류, 험준한 계곡, 높은 산, 타오르는 불길은 모두 다 이 두려움의 소재들이다. 두려움 앞에 개인이 굴복하여 그가 원래 속해있던 곳으로 얌전히 발길을 돌리게 만드는 작용들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원래 속해있던 곳은 어떤 곳일까? 꿈같은 낙원이다. 꿈꾸는 낙원이다. 모든 것이 다 이상적이고 완벽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믿으며 사람들이 그러한 꿈을 꾸고 있는 꿈의 낙원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곳이다.
두려움과 꿈, 두려움과 잠은 이처럼 대비를 형성한다. 두려워서 꿈꾸며, 두려워서 잠든다. 그래서 두려움의 대상이 큰 만큼, 꿈꾸는 수면 상태는 더 달콤해진다. 내일 치를 시험에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오늘 밤에 즐기는 게임이 더 짜릿한 것과 같다. 공포가 낙원을 강화하는 셈이다. 그래서 낙원을 꿈꾸는 이들은 사람들에게 더욱 많이 두려움을 조장한다. 낙원 밖에 대해 사람들이 더 많은 두려움을 느낄수록, 낙원은 더욱 가치 있는 곳으로 공고하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환상은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이 표현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이상적인 낙원과 같은 꿈의 양분이 두려움이라는 것은, 두려움 또한 실제의 것이 아닌 허구의 것일 수 있다는 이해를 우리가 언뜻 눈치챌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떨림 자체가 허구라는 것이 아니다. 그 떨림을 촉발하는 대상이라고 상정된 그것이 허구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길을 가고 싶은 이는 지금 부모라고 하는 대상에게 혼날까 봐 두려워서 떨리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은 다만 두려움과 낙원의 양가적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선정된 허구의 기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무엇 때문에 떨리는 것일까?
불안의 깨어남과 두려움의 깨어짐
사실 떨림은 ‘무엇’ 때문이 아니다. 떨림에는 놀랍게도 대상이 없다. 그냥 떨리는 것이다. 삶 자체가 그냥 떨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처음에는 두려움이라고 생각되었던 떨림은 이제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그 이름은 바로 불안이다.
두려움과 불안의 심리철학적 구분은 명확하다. 두려움은 대상을 갖는 것이며, 불안은 대상이 없는 것이다. 곧 두려움은 대상에 대한 반응이고, 불안은 그냥 자신의 상태다. 그것도 아주 근본적인 상태다. 다시 말해 불안은 자신을 일깨워주는 근본이라는 말과 같다.
아주 단순하다. 불안을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처음으로 의식해본다. 반면 두려울 때는 자신이 없다. 이것은 중의적인 표현이다. 자신(自身)도 의식하지 못할뿐더러 자신(自信)도 없다. 다만 어떻게 이 두려움을 해결해야 할지를 궁리하며 두려움의 대상에만 모든 의식이 집중된다. 그 결과, 그냥 잠들고자 한다. 잠이라고 하는, 꿈이라고 하는 낙원으로 철수하고자 한다. 자신을 망각한 채 무기력해지거나 쾌락에 중독된다. 이것이 바로 우울의 상태다.
그래서 심리적 역동으로 이해했을 때, 우울은 불안의 정반대에 있는 것이다. 불안해서 우울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안은 우울의 치료제다. 이를 다시 묘사하자면, 불안은 자신의 삶을 자각한 상태며, 우울은 자신의 삶을 망각한 상태다. 떨림을 단지 두려움의 징후로만 착각한 결과 환상의 낙원으로 도망쳐 실제적인 삶을 상실하게 된 것과 같다.
우리가 불안할 때, 우리는 분명 망각 되었던 삶을 다시 찾는 중인 것이다. 불안이라는 언어가 여전히 불편감을 준다면 다만 떨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떨린다. 산다는 것은 떨린다는 것이다. 생명은 떨고 있다. 대표적으로 호흡은 어떻게도 부정할 수 없는 떨림의 근본 현상이다. 그런데 호흡은 다른 것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이루어진다. 호흡이라는 작용으로 떨고 있다는 것은 자신으로 살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사는 것일까?”
이것은 불안이 촉발한 신성한 떨림의 물음들이다. 두려움은 이 물음들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움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이 물음들을 억압하기까지 한다. 왜 그럴까?
두려움은 두렵기 때문이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나가려는 ‘깨어난 이’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 깨어남으로 말미암은 꿈의 낙원의 깨어짐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안의 깨어남은 두려움의 깨어짐을 의미한다. 우울에 대한 특효약이 불안이듯이, 두려움 또한 불안에 의해 효과적으로 처방된다.
두려울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적확하며 유효하다.
“나는 지금 두려운 것이 아니라, 깨어나는 중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으로 깨어나는 이 일은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다. 나로 사는 일, 이것만이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이다. 나는 이제야 시작된, 나로 깨어나는 그 감동에 지금 떨고 있다.”
이것은 가장 깊은 밤 달빛에 비치어 그 숨결과 그 자태가 뜨겁게 요동치는 백마를 타고 달려나가던, 그렇게 가장 아름답게 떨리는 마음을 타고 한없이 달려나가던 싯다르타의 전율이다.
자신과 자유: 답을 구하는 답
“그래도 될까?”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도 된다.”
얼마든지 자신이어도 된다. 아니, 우리는 애초 자신일 수밖에 없다. 떨리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며, 살아 있는 것은 언제나 자신으로서 살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의 자연스러운 속성이다.
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즉 스스로 자신으로 존재한다. 존재가 이처럼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바로 그 방식이 떨림이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존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그 속성을 묘사했을 때, 이는 바로 “존재는 떨고 있다”라는 말과 같다. 이와 유사하게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표현 또한 이 모든 존재가 하나의 낙원과 같은 답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계속 스스로 떨며, 그럼으로써 그 모든 정해진 답을 떨치며, 답이 없는 떨림으로서의 면목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떤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존재의 본래면목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실존철학의 아버지인 키르케고르는 이 불안이라고 하는 떨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자유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일 자유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이라는 말이다.
“불안은 자신의 가능성이다.”
따라서 이렇게 표현해도 무방하다. 이처럼 자신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가능성을 실현하려는 일은 언제나 불안을 동반한다.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사실 동어반복이다. 살아 숨 쉬고자 하는 이는 언제나 호흡을 동반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불안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 자신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떨림은 분명한 나침반이다. 우리가 더욱 떨림을 체험하게 되는 바로 그 방향에 더욱 자신이라는 존재의 면목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상황은 반전된다. 이를테면, 돈을 못 벌까 봐 두렵다는 말을 하는 이가 있다고 할 때, 그는 사실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이라는 대상을 놓고 두려운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 떨림은 사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대상이 없는 불안을 가리킨다. 불안으로 알려지는 자신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글쓰기를 하는 현실에, 그리고 그 현실에서 개방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자신의 존재에 전율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불안이 두려움의 특효약이라는 말은, 이 ‘글 쓰는 이로 존재하고 싶은 불안’을 정직하게 따라가면 ‘돈을 못 벌 것 같은 두려움’은 해체된다는 뜻이다. 싯다르타의 백마가 그 모든 두려움 너머로 싯다르타를 자유롭게 이동시켜주는 일과 같다.
불안은 분명 답이 없기에 답을 구하려고 하는 상태다. 그러나 그처럼 답을 구하려고 떨리는 그 상태가 바로 답이다. 허구의 낙원 속 어디에도 자신을 위한 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며 떨리고 있는 그 자신이 바로 답이다. 자신을 위한 답은 바로 자신이라고 하는 답이다.
이처럼 떨림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정확하게 안내한다. 더욱더 떨리는 방향으로 나아갈수록 우리는 더욱더 자신이 된다. 그렇게 자신이 됨으로써 우리는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 태자의 서원이었다.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중생들을 생사의 바다에서 해탈시키지 못하면 나는 마침내 가비라성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마음이 원하는 것은 자유다. 자신이다. 차라리 죽더라도 자신으로 살 것이다. 이처럼 그 자신일 자유를 드러내는 길이 모두를 그 자신으로 살리며 자유롭게 만드는 길이다. 떨리는 마음이 그려낸 고귀한 궤적이다.
임인구
마음과 시선 실존상담소 소장이자 서울불교대학원대학 불교상담전공 초빙교수. 선불교의 현대적 적용으로서 상담을 꿈꾸는 불교상담자, 실존상담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