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과 연천의 성과 고분
남한의 고구려 유적은 위로는 연천 일대, 아래로는 진천과 대전까지 분포해 있다. 성은 연천의 고구려성들 가운데 형태가 잘 남아 있는, 호로고루성·당포성·은대리성 등 세 곳, 산은 20개의 고구려 보루터가 있는 아차산, 고분은 연천 신답리 고분군을 찾았다. 위 성들 외에 파주의 덕진산성이 잘 남아 있기는 하나 군사시설 내에 위치해 접근이 쉽지 않고, 진천의 대모산성과 대전의 월평동산성은 석축이 잘 드러나 있지 않아서 뺐다. 서울 몽촌토성에서도 고구려 유물들이 발견됐으나 백제가 쌓은 토성이어서 이 또한 제외 했다. 고분은 신답리 외에 춘천 신숭겸장군묘역과 신매리에도 있으나 봉분 형태가 아니어서 싣지 않았다.
아차산성의 둘레는 약 1,043m이고 가장 높은 망대지는 해발 203.4m, 낮은 수구지는 122m다. 아차산성은 수락산에서 뻗어 나온 아차산이 한강과 맞닿기 전 솟아오른 봉우리에 쌓은 성이다. 급한 경사면에 자리한 성 남쪽에 서면, 한강과 풍납토성·몽촌토성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떤 적도 쉽게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자리했다. 백제가 나라의 기틀을 잡았던 한강은, 396년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주인이 바뀐다. 이후 백제의 근초고왕이 수복하지만,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고구려가 차지한다. 이때 백제의 개로왕이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후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한강을 회복한다. 고구려는 한강을 되찾고자 온달 장군을 내세웠으나 그 또한 590년 아차산성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현재 아차산성은 발굴 조사를 위해 일반인 출입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산행로를 따라 드러난 서쪽 성벽만 볼 수 있다. 몇 차례의 아차산성 발굴 조사 결과, 지금 남아 있는 석축은 신라의 것으로 드러났으나, 출토된 토기·기와·목기·철기류 등과 같은 유물 안에는 고구려 연화문와당을 비롯해 백제의 토기류 등도 적게나마 포함돼 있다. 홍련봉 보루를 포함해 아차산에서 용마산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20여 개의 고구려 보루가 축조됐다. 홍련봉에서 출토된 와당은 아차산성 망대지의 연화문와당과 비슷한 고구려 것으로 본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현재의 아차산성이 고구려가 머물던 시기에 완성된 것은 아니라 해도, 475년에서 551년 백제가 재진출하는 사이 고구려 군사가 머물며 진을 쳤던 곳임은 분명해 보인다.
호로고루성은 서울과 평양을 잇는 길목에 자리한 요충지로서, 고구려가 멸망한 뒤로 신라와 고려도 이용했다. 언뜻 보면 모든 성벽의 돌쌓기가 별다를 게 없는 듯하지만, 시대와 나라별로 차이를 보인다. 백제의 성들은 주로 판축기법을 썼다. 사각으로 판자를 두르고 안에 흙과 썩은 이파리 등을 넣은 뒤, 사람이 그 안에서 공이질을 하며 사다리꼴 모양으로 쌓는 게 판축기법이다. 몽촌·풍납토성 등이 이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고구려는 지형에 따라 판축과 돌쌓기를 적절하게 이용했다. 호로고루성은 기단 1m 정도를 판축으로 쌓았고 그 위에 고구려성 돌쌓기의 특징인 6합쌓기와 들여쌓기 방법을 썼다. 전면은 사각, 뒷면은 쐐기형인 비슷한 크기의 직사각형 돌 일곱 개가 6합쌓기의 한 세트다. 가운데 하나를 놓고 나머지 여섯 개가 그 돌을 감싸면 외부 충격으로 돌이 흔들리거나 몇 개가 빠져도 한꺼번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호로고루성 둘레는 약 401m이고 정문이 있는 동쪽 성벽은 너비 6m, 높이 10m에 이른다. 성안에서는 집수구·우물·온돌이 설치된 기와집 터 등이 드러났다. 그 밖에도 아차산성에서 나온 것과 같은 연화문와당과 토기류·철기류·동물들의 뼈·벼루·남성용 소변기 등 다양한 고구려 유물들이 출토됐다. 토기에는 ‘官’, ‘甲’ 등의 명문이 새겨진 것들도 있다. 다른 성에서 볼 수 없는 여러 유물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호로고루성에는 주변의 다른 성을 관할하는 관청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2014년부터 장남면 주민자치위원회 주관으로 시작한 통일바라기 축제는 호로고루성의 미래가 됐다. 축제는 일 년 중 노을이 가장 아름답고 해바라기가 만개하는 9월 초에 시작한다.
당포성은 호로고루성과 같이 동쪽 면에 성벽을 쌓았다. 성의 남쪽 수직면은 호로고루성에 비해 높다. 성벽 둘레는 약 450m이고 그 중 동쪽 성벽 길이는 약 50m, 높이는 6.5m이다. 발굴 과정에서 성벽을 버티게 해주는 성벽 속의 수직 기둥 자리 10개가 드러났다. 이 또한 고구려성 석축의 특징이다. 호로고루성에 비해 유물의 양이 많지 않지만, 고구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토기류 및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됐다. 성은 사방으로 산들에 갇혀 있어서 답답하지만, 이른 아침 성 서쪽에 있는 삼화교 위에서 보는 역광의 임진강과 장쾌한 산 능선은 역동적이다.
은대리성은 전곡리 선사유적과는 승용차로 2~3분 거리에 있다. 한탄강과 차탄천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임진강 유역의 세 성 가운데 둘레가 가장 긴 1,005m다. 축성 방식이 다른 성들과는 다르게 기단부에 모래와 점토를 다지고 그 위에 돌을 넣었다. 돌은 질서 있게 차곡차곡 쌓은 게 아니고 점토에 돌을 섞었다. 성안에는 길이가 약 60m에 이르는 큰 건물지가 발견됐으나, 호로고루성이나 당포성처럼 기와편이 출토되지는 않았다. 성의 동쪽 벽이 두 성에 비해 작고 낮아도 강으로 이어지는 남쪽 절벽은 호로고루성의 거의 두 배에 이를 만큼 높다.
글・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