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륜성왕을 꿈꾼 광개토왕] 고구려 불교 이해하기 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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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륜성왕을 꿈꾼 광개토왕] 고구려 불교 이해하기 ➋
  • 남무희
  • 승인 2024.03.2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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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전한 고구려 스님들

고구려는 국가 성립 시기부터 북방의 여러 유목 민족과 서남 지역의 중국 민족과 다양하게 교류하고,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국가를 발전시켜 왔다. 그러한 과정에서 북방 유목 민족과 서방의 중국 민족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불교를 수용하게 된다. 그 결과 중국에서 활동한 고구려 승려들이 등장한다. 또한 소수림왕 대에는 고구려 국내성으로 불교가 전래됐다. 한편 고구려가 소수림왕 대 이후부터 확보한 요동 지역으로도 불교가 전파됐다. 그리고 광개토왕 대 이후 고구려가 확실히 확보한 대동강 유역의 평양 지역에도 불교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 글에서는 장수왕 대 평양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고구려 불교의 수용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고구려 승려들의 활동 유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속에서 고구려가 중국의 북방 유목 민족과 중국으로부터 수용한 불교 사상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도 개략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고려도인(高麗道人)

고구려는 전진(前秦)을 통해 불교를 수용하기 이전부터 석륵(石勒)의 후조(後趙), 모용씨(慕容氏)의 전연(前燕)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이때 후조 또는 전연을 통해서 불교가 전래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후조에서는 승려 불도징(佛圖澄, 232~348)의 노력으로 불교가 크게 융성했다.

『양고승전』 「축잠법심전(竺潛法深傳)」과 고려시대에 각훈(覺訓) 스님이 펴낸 『해동고승전』의 「석망명전(釋亡名傳)」에는, 동진의 지둔도림(支遁道林, 314~366)이 고려도인(高麗道人) 또는 이름을 전하지 않는 스님에게 축잠법심(竺潛法深, 286~374)의 높은 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지둔도림과 직접 서신을 교환할 정도로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고려도인의 존재가 주목된다. 지둔도림이 입적한 해는 고구려에서 불교가 공인된 소수림왕 2년(372)보다 6년이나 앞서고 있다. 이 당시 고려도인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청담(淸淡)적인 격의불교(格義佛敎)를 이해할 수 있는 승려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유행한 청담적인 격의불교는 중국에서 불교를 수용할 때,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이해한 불교를 말한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이미 중국에서는 지둔도림과 축잠법심의 청담 격의불교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고구려 출신의 승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양고승전』 「축잠법심전」에서는 ‘고려도인(高麗道人)’이라고 했으며, 『해동고승전』에서는 ‘이름을 잊어버린 스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의 한계 때문에 이 당시 중국에서 활약하고 있던 고구려 승려의 구체적인 법명을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중국의 남북조 지역에서 활약하던 고구려 승려들이 다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국내성(國內城)의 불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봉상왕 2년조(293)에는 전연의 모용외가 침입해 오자 왕이 곡림(鵠林)으로 도피했는데, 당시 신성 태수로 있던 북부소형 고노자(高奴子)가 이들을 물리쳤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여기에 보이는 ‘곡림(鵠林)’이라는 지명이 주목된다.

곡림은 ‘고니의 숲’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의 쌍림(雙林)에서 열반에 드셨을 때 그 숲이 하얀색으로 변했다는 불교 설화에서 유래하는 지역명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당시 고구려에서는 후조 또는 전연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이른 시기부터 이미 ‘곡림’이라는 불교 용어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는 3세기 말 무렵부터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전진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및 『해동고승전』의 관련 기록에는 전진(前秦, 351~394)의 왕으로 있던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소수림왕 2년(372) 6월에 순도(順道) 스님을 고구려로 보내면서 불상과 불경을 전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2년 뒤(374)에는 동진(東晋)에서 온 아도(阿道) 스님이 고구려로 왔다. 이에 다음 해에(375) 초문사(肖門寺)를 세우고 순도 스님이 머무르게 했다. 한편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세우고 아도 스님이 머무르게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로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에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소수림왕 5년(375)에는 국내성에 초문사와 이불란사라는 고구려 최초의 사찰을 건립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당시 국내성에 사찰이 건립되면서 순도와 아도 스님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활동했을 것이다.

이 당시 고구려에 처음으로 전래된 불교는 당시 중국의 남북조 지역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던 청담 격의불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초전불교의 사상과 신앙에 대해 고구려 왕실은 크게 관심을 표방했을 것이다.

나아가 고구려는 고국양왕 9년에 왕이 ‘불교를 숭신(崇信)하여 복(福)을 구하라’는 교지(敎旨)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국사(國社)를 건설하고 종묘(宗廟)를 수리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이러한 기록으로 당시 고구려 국내성으로 수용된 불교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대에 국내성 지역으로 전래된 불교는 많은 사람에게 인과(因果)의 원리를 알려주고, 현실 세계에서 화(福)를 물리치고 복(福)을 구하게 하는 현세 이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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