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역사: 사찰로 온 헤라클레스] 포토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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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역사: 사찰로 온 헤라클레스] 포토에세이
  • 유동영
  • 승인 2023.10.2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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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도량을 지키라
폐사지 석탑의 금강역사
토함산 동쪽 중턱에 자리한 장항리사지의 연화대좌와 동·서오층석탑

금강역사가 새겨진 남한 내 탑은 신라 9곳, 고려 2곳 등 대략 11곳에 이른다. 이 11곳 가운데 장항리사지 오층석탑·간월사지 삼층석탑·서악동 삼층석탑·안동 조탑리 오층전탑·안동 운흥동 오층전탑·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등, 지금은 목탁소리가 끊긴 폐사지 6곳의 석탑을 포토에세이에 담았다. 광양 중흥산성 석탑은 현대에 문을 연 중흥사 경내에 있기는 하나 서로 관계가 없을 뿐더러 탑의 본래 위치도 지금과는 다른 곳이었기 때문에 폐사지 탑으로 보았다. 고려 2곳 가운데 석탑이 아닌 승탑에 새겨진 법흥사 승탑은 뺐다. 사진 순서는 학계에서 다수가 인정하는 조성 시기에 따랐으나, 중흥산성 삼층석탑과 안동 모전탑들의 순서가 바뀐 것은 편집·디자인을 고려한 것이다.

 

서오층석탑의 부조
서오층석탑의 부조

장항리사지 동・ 서오층석탑          

아직 절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 절터가 위치한 동네 이름을 따서 장항리사지라 부른다. 발굴 결과에 따르면 금당과 탑의 배치가 특이하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마당이 좁아서였는지 탑과 금당을 거의 수평으로 배치했고, 거리 또한 대부분 20m를 유지하는 데 반해 25m에 이른다. 현재의 지형이라면 동탑은 계곡 아래에 놓여 있는 게 맞다. 2022년 태풍으로 동쪽 계곡은 큰 바위들이 드러날 만큼 더욱 깊게 파여 있다. U 자 형태의 계곡에 둘러싸인 사지를 보며 폐사의 원인이 자연재해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동오층석탑의 부조

장항리사지 탑은 분황사 모전탑 이후, 금강역사가 부조된 탑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인 8세기 초·중반으로 본다. 탑의 결구 방식과 금강역사 부조 기법이 그 근거다. 서탑 금강역사의 역동성과 상투·천의(天衣) 등이 석굴암의 금강역사나 사천왕과 닮았다. 동·서탑의 재질과 부조 양식이 차이를 보이는 것은 조성 시기 때문이 아니라 부조한 장인이 서로 달라서 생긴 차이라고 본다. 발굴 시 탑과 좌대 외에 하반신이 사라진 석불입상이 수습됐다. 석불입상은 보존 처리를 거친 뒤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모셨다. 

동쪽으로 자리를 잡은 간월사지는 숙박업소가 빼곡한 간월산의 숨통이다.

 

간월사지 삼층석탑          

간월사지는 자장율사가 통도사보다도 먼저 창건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나 이후 복원돼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 법석이 열렸다. 폐사 이후에는 민가가 들어서고 밭으로 개간되는 과정에서 전면 석축이 사라지고 탑 부재들이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 쌍탑과 울산의 유일한 보물 불상으로 불리는 석조여래좌상이 남았다. 간월사지와 장항리사지의 역사가 서로 비슷한 듯 차이를 보인다. 

동작과 천의는 비슷하나 간월사지 역사(力士)들은 금강저 대신 모두 주먹을 쥐고 있고, 연꽃 좌대 대신 구름 좌대 위에 있다. 가슴골 또한 간월사지 역사들이 도드라진다. 남·북탑의 조각 기법도 다르다. 남쪽의 금강역사상 사이에 있는 사각 문비에는 문고리와 광배가 있으나 북탑에는 없다. 북탑은 경내에 있는 천연 암반에 올렸고, 남탑은 탑을 세우기 위해 단을 만들었다. 두 탑 모두 경내의 암반을 재료로 썼다.

 

서악동 삼층석탑    

탑은 선도산 아래 서악동 샛골에 고분들과 함께 있다. 모습이 동적이지 않고 양감이 약하긴 해도 두광을 가진 표정이 익살스럽다. 문비에는 문고리를 매달았을 법한 구멍이 있다.

 

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백운산 중흥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과 왜군의 치열한 전투가 있고 나서 모두 불에 탔고 절의 흔적은 사라졌다.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탑과 쌍사자 석등만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때 반출된 석등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국보로 지정됐다. 중흥사지는 특정할 수 없고, 현재의 탑지는 옮겨온 자리다. 

1탑에 단일한 상으로 새겨졌던 금강역사는 통일신라 말로 접어들며 사천왕상·범천 등이 함께 새겨진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중흥산성 삼층석탑이 대표적인 탑이다. 1층 탑신에는 사방불이 새겨져 있다. 금강역사상은 이전의 상들과는 다르게 양감이나 역동성도 떨어지고 표현도 거칠다. 남면에 금강역사 2구, 서면에 사천왕상 2구, 북면에 공양상 2구 등이 새겨져 있다.

 

출처 문화재청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          

탑의 안정성에 문제가 있어 2013년 해체를 시작했다. 해체 시 탑의 중심을 잡아주는 나무 심주가 드러났고, 심주 외에 탑을 구성하는 구성물은 전돌 7,000점, 석물 2,000점 등 총 9,000점이 나왔다. 부속물은 세 개의 창고에 하나하나 번호를 매겨 보관 중이다. 국내에서 전탑을 전면 해체·보수하는 일은 처음이다. 2021년부터 작업을 인계해 수행하고 있는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은 연구자들의 조언에 따라 세심하게 작업 중이다. 그동안 화강암으로 알려졌었던 기단과 금강역사상의 재질이 해체 중에 사암으로 밝혀졌다. 목표한 대로 2026년 보수가 완료된다면, 그동안 눈을 부릅뜨고 자리를 지켜온 금강역사 덕분이다.

해체된 조탑리 오층전탑의 금강역사상

 

안동 운흥동 오층전탑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안동을 비보하기 위한 탑으로 법림사에 7층으로 세워졌었고,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양등산이 금동 상륜부를 가져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사진에 의하면 이미 5층인 모습으로 나온다. 기단부가 없는 점 또한 이 탑의 특징이다.

탑은 1층 탑신 남면에 감실이 있고 그 위 2층에 금강역사상이 있다. 부처님을 모시는 감실 위에 금강역사상이 있는 점이 의아하다. 금강역사상은 낮은 육계와 화관을 하고 있으며, 2구 모두 금강저를 들고 구름 대좌에 서 있다. 마모가 있으나 역동적인 천의와 근육과 표정들이 섬세하게 드러난다. 

개심사지의 뜨는 해는 보지 못했으나, 가을 하늘 노을에는 예천 황금 들판의 풍요가 스며 있다.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예천의 호족세력인 임씨와 최씨가 농민예비군 1,150명과 수레 18대, 소 1,000마리를 동원해 고려 현종 1010년에 시공하고 이듬해인 1011년 완성했다’는 내용이 탑면에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말 경상북도 북부는 왕건과 견훤의 세력이 맞부딪치며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곳이다. 왕건이 후삼국을 평정한 뒤라도 수시로 찾아와 적이 뒤바뀌었던 이곳은 후유증이 쉬 가시지 않았을 뿐더러 이 시기는 거란족의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했을 때다.

탑은 통일의 여정에 갈렸던 갈등을 봉합하고, 나라의 안위를 위협하는 외세를 물리치고자 하는 예천 군민의 염원으로 세워졌을 것이다. 개심사지 탑은 각 모서리로 방향을 잡아서 놓았다. 하층 기단부 북쪽 면에는 부처님의 자리를 의미하는 쥐부터 시계방향으로 12지신을, 상층기단부에는 팔부중상을, 탑신 남면에는 금강역사를 새겼다. 상의 부조도 약하고 섬세하지는 않으나 굵고 담박한 선이 오히려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한다. 부처님의 법을 어찌 힘으로서만 지킬 수 있을까.

 

글・사진. 유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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