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역사는 조선 후기 나한전과 명부전의 수문장이 되면서 장군상(將軍像)으로 이름을 바꿨다. 완주 송광사에는 금강문의 금강역사상[도판 1]과 나한전의 장군상[도판 2], 지장전[명부전]의 장군상[도판 3]이 있다. 조선시대 불교도들은 형상은 비슷하지만 있는 장소에 따라 ‘금강역사상’과 ‘장군상’으로 달리 불렀던 것이다.
금강문, 나한전, 명부전의 금강역사상과 장군상의 외모는 비슷하다. 한쪽 손은 위로 들어 주먹을 쥐었고, 반대편 손은 허리에 대거나 금강저를 들거나 칼을 들고 있으며, 올린 손은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두 눈은 튀어나올 듯이 크게 뜨고 있으며, 입은 다물거나 살짝 열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옷 입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 유형은 상투 튼 머리, 나신의 상체, 짧은 치마를 걸친 하체, 맨발로 서 있는 것이다. 상체는 벗은 채 한쪽 어깨 위에서 반대편 겨드랑이 사이로 비단을 둘러 묶고 있으며, 하체에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다. 어깨에 걸친 천의(天衣)는 바람에 휘날리듯이 신체를 타고 내려와 한쪽 끝은 왼발 부근에, 다른 쪽 끝은 오른발을 감싼 채 흘러내리고 있다. 맨발의 발목, 팔목, 어깨에는 장신구를 하고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천왕문의 사천왕과 유사한 복장을 하고, 목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있으며, 발에는 부츠를 신고 있다.
완주 송광사의 경우 지장전의 상은 첫 번째 유형이며[도판 3], 금강문과 나한전의 상은 두 번째 유형인데 미세한 차이가 있다[도판 1, 2]. 나한전 장군상의 위로 든 손은 맨주먹이고 반대편 손은 허리에 대거나 용을 잡고 있다. 반면 금강문 금강역사상은 올려 든 손에 금강저를 들었고, 반대편 손에는 칼을 들거나 용을 잡고 있다.
금강역사·인왕상·장군상 다 같은 상일까?
왜란과 호란이 끝난 후 전쟁으로 불탄 사찰은 대대적으로 중창됐다. 새롭게 사찰이 정비되면서 가장 많이 건립된 불전은 나한을 모신 나한전과 지장보살과 저승의 재판관인 시왕상을 봉안한 명부전이다. 나한전에서는 지금 필요한 것을 기도했고, 명부전에서는 죽은 자의 명복을 기원했다. 두 불전에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과 신앙이 잘 스며 있다.
두 불전 내부에 20여 존이 넘는 여러 존상이 모셔진 점, 사람들의 선과 악을 기록하고 보고하는 심부름꾼인 사자(使者)가 배치된 점, 출입하는 자들을 관리하는 장군(將軍) 또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문을 지키고 있는 점에서 공통성을 갖는다. 특히 문의 좌우를 지키는 존상은 현재 금강역사와 인왕(仁王)으로 불리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배치된 금강문의 존상과 모습이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불교인들은 나한전과 명부전[지장전]의 문지기는 금강역사상 또는 인왕상이라고 하지 않고 대부분 ‘장군상(將軍像)’이라고 했다. 물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미황사 응진당처럼 ‘금강역사’로 사용한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조선 후기 불교조각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된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전공자들 가운데는 나한전과 명부전의 장군상을 금강역사상 또는 인왕상으로 혼용해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나한전과 장군상
조선시대 불상의 가장 큰 특징은 불상 내부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복장의식(腹藏儀式)으로 다양한 복장물이 납입됐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불상의 이력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바로 불상을 조성한 목적과 각자 발원한 내용 그리고 참여한 인물을 기록한 ‘발원문(發願文)’, ‘원문(願文)’, ‘시주기(施主記)’ 등으로 불리는 복장 기록이다. 이 기록에는 문지기를 ‘장군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완주 송광사 나한전에는 석가여래·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로 구성된 석가삼존상, 16나한상, 용녀상, 사자상, 제석천상, 장군상이 좌우 대칭으로 봉안됐고, 500나한상이 벽면에 배치됐다.
송광사 나한전 존상은 1656년(효종 7)에 조성됐다는 복장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기록에는 ‘대영산교주 석가여래, 좌우보처 제화갈라보살과 자씨미륵보살, 16대아라한, 오백성문, 용녀헌주(龍女獻珠), 제석, 장군, 사자, 동자 등을 조성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오른쪽 장군상은 의운(義雲) 스님이, 왼쪽 장군상은 응림(應林) 스님이 시주한다’고 기록했다[도판 4]. 이를 통해 문 좌우에 배치된 두 명의 신장상은 장군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완주 송광사 인근에는 조선시대 나한신앙과 관련된 여러 일화를 남기고 있는 진묵대사(1562~1633)가 주석한 봉서사가 있다.
진묵대사의 나한 관련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전주부(全州府)의 한 아전이 관가의 돈을 마음대로 쓰고 죄를 받게 됐다가, 진묵대사의 조언대로 나한에게 공양을 올린 인연으로 감옥의 옥리(獄吏)가 되어 빚을 갚았다는 내용이다. 진묵대사는 나한당에 들어가 주장자로 나한들의 머리를 세 번씩 때리고 빚진 아전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머리를 맞은 나한들은 ‘아전의 꿈에 나타나 직접 요청할 것이지 스승에게 일러 머리를 맞게 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현세 이익적인 면과 나한과 관련된 진묵대사의 일화는 봉서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송광사에 나한전을 건립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금강역사’로 표현된 중수 기록
조선 후기 나한전 존상과 관련된 복장 기록에는 문지기를 장군상으로 표기한 예가 대부분이지만, 해남 미황사 응진당 존상의 중수 기록(1737년)에는 법당의 문지기를 ‘금강’이라고 했다. 응진당 본존인 석가여래상 대좌 윗면의 중수 기록에는 “1737년 4월에 석가삼존상, 나한상 16위, 제석천 2위, 사자상 2위, 금강역사상 2위, 동자상 3위를 중수하기 시작해 5월 21일에 마쳤다”는 내용이 있다[도판 5]. 미황사 응진당 중수기에서는 문지기를 ‘금강(金剛)’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도판 6].
나한전[응진당]에 금강역사가 배치된 연원은 간다라의 석가여래 일대기를 표현한 불전미술에서 찾을 수 있다. 석가여래의 첫 설법 대상은 녹야원에서 수행하고 있던 다섯 수행자였다. 첫 설법을 들은 다섯 수행자는 곧바로 나한이 됐는데, 이 설법 장면에 간다라인들은 석가여래의 수호자로 금강역사를 출현시켰다. 손에 금강저를 든 금강역사는 석가여래의 곁에 표현됐는데 헤라클레스 모습을 하고 있다[도판 7]. 조선시대 나한전에 문지기를 배치하고 ‘금강역사’라고 인식한 것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나한전의 문지기를 금강역사로 인식한 또 다른 예를 필자는 진묵대사와 관련된 일화에서 찾고자 한다.
(진묵)대사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나 ‘곡차(穀茶)’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았다. 어느 날 어떤 스님이 술을 거르고 있었는데, 술 향기가 퍼져 코로 들어왔다. 대사는 그곳을 찾아가서 그에게 물었다.
“스님이 거르는 그것이 무엇이오?”
스님이 대답했다.
“술을 거르고 있습니다.”
대사는 잠자코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다시 가서 물었다.
“그대가 거르는 그것이 무엇이오?”
방금 전처럼 대답하자 대사는 무료하게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대사가 또 가서 방금 전과 같이 물었다. 그러나 끝내 ‘술을 거른다’고 대답하였다. 대사는 마침내 실망하고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금강역사가 철퇴로 술 거르던 스님을 내려쳤다.
- 각안, 『동사열전』 「진묵조사전」
나한과 많은 에피소드를 가진 진묵대사와 관련된 금강역사 이야기는 간다라 불전미술에서 석가여래를 호위하던 금강역사의 역할과 같다.
명부전의 장군상
조선 후기 명부전에는 지장삼존상(지장보살·도명존자·무독귀왕) 좌우로 명부세계의 재판관인 시왕(十王), 판관(判官), 귀왕(鬼王), 장군(將軍), 동자(童子) 등이 배치됐다. 나한전과 마찬가지로 명부전 입구에는 좌우로 장군상이 지키고 있다[도판 8].
명부전에 장군상이 배치된 것은 『예수시왕생칠경』의 변상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명부전에 시왕, 판관, 귀왕, 동자 등 다양한 존상과 함께 등장하는 장군상은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중원갈장군(中元葛將軍) 등과 관련된 것이다. 세 명의 장군상을 조선 후기 명부전에서는 문지기인 좌우 두 명의 장군상으로 표현한 것이다[도판 9].
화계사 명부전 존상의 복장 기록(1649년)에도 장군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이 있다[도판 10]. 화계사 명부전 장군상은 주먹을 쥔 한쪽 손은 위로 들었고, 반대편 손에는 칼과 금강저를 들고 있다.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부츠를 신고 있는 모습은 사천왕과 유사하다[도판 11].
조선시대 명부전 존상 가운데 복장 기록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예로는 영광 불갑사를 들 수 있다. 불갑사 명부전 존상에서는 복장 전적과 함께 조성발원문, 후령통 등이 대부분의 존상에서 모두 수습됐다. 이 가운데 왼쪽에 배치된 판관상에서 수습된 발원문에도 장군상을 시주한 내용이 기록됐다[도판 12].
불갑사 명부전 장군상은 올려 든 팔의 옷자락과 반대편 팔의 옷자락이 위로 치솟아 앞에서 예로 든 다른 장군상에 비해 동적인 느낌이 강하다. 꼭 다문 입의 표현은 서울 화계사 명부전 장군상(1649년)을 계승했고 완주 송광사 나한전의 장군상(1656년)에 영향을 주었다[도판 13].
조선 후기 유장원(1724~1796)이 쓴 『상변통고』(1830년)에는 명부전 장군상을 금강역사로 인식한 내용이 있다. “염라대왕은 후세의 형관(刑官)이고, 금강역사는 후세의 위사(衛士)”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유장원은 염라대왕은 형을 내리는 역할 담당자로, 금강역사는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자로 서술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시대에는 나한전과 명부전 존상의 문지기를 금강역사로 인식한 경우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조성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에서는 ‘장군상’으로 표기하고 있기에, 앞으로는 장군상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글·사진. 유근자
유근자
동국대 예술대학학부 불교미술 전공 강의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천광역시 문화재위원, 강원도·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 기록과 부처님의 생애를 표현한 간다라 불전미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시대 왕실발원 불상의 연구』, 『조선시대 불상의 복장기록 연구』가 있고, 공동 저서로 『간다라에서 만난 부처』와 『치유하는 붓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