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B급 스님들] 계(契)를 하는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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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B급 스님들] 계(契)를 하는 스님들
  • 한상길
  • 승인 2023.08.2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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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계, 조선불교의 원동력
통도사 병오갑서문(1881)

조선불교의 고난

조선은 새 왕조의 이념을 숭유억불로 내세웠다. 고려시대까지 불교계가 누려왔던 권력과 사회 지도 이념으로서의 가치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신왕조는 사찰이 지닌 전답과 노비를 압수하고, 아예 절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또한 승려의 자격을 공인하는 도첩제를 폐지하자 출가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억불의 조처가 20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16세기 이후에는 더 이상의 법령이 필요 없을 만큼 불교는 약화했다. 

19세기 초, 다산 정약용은 승가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한다. 

“양반 관리(존관尊官)들이 반나절을 즐기기 위해 절에 찾아오면 노승들은 3일 동안 쉬기를 잊고 하루는 휘장을 치고, 하루는 잔치에 참여하며 나머지 하루는 청소를 해야만 하였다.”

본인 역시 양반사회의 지배계층이었던 다산의 지적이 이 정도라면 불교의 현실은 얼마나 피폐했는지 알 만하다. 

흔히 이 시기를 조선의 문예부흥기라 하고 정조를 성군이라 평가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승가의 신분은 더욱 격하돼 천민 취급을 받았다. ‘사천승도(私賤僧徒)’, ‘사노비의승(私奴婢義僧)’, ‘무격승니(巫覡僧尼)’, ‘무녀비구니(巫女比丘尼)’ 등이 이러한 표현이다. 아예 스님을 사농공상의 4민(四民)에서 제외해 ‘이색(異色)’ 또는 ‘이단(異端)’이라고 천시하기도 했다. 

조선불교는 이러한 어려운 현실에서도 살아남았다. 그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고난의 시대에서도 중생의 고통과 함께하고, 불법의 진리를 일궈내며 한민족의 문화 전통으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날 사찰의 모습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억불의 압제하에서도 불상을 봉안하고, 불화를 조성했으며 전각을 세워 불법을 지켜냈다. 이 조선의 불교문화가 지금 우리 시대 불교의 모습이다. 

이러한 조선불교의 저력과 동력은 다양한 요소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사찰계의 결성과 활동이 큰 역할을 차지한다. 계(契)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일정 기간에 일정한 액수의 금전을 출자해 상호부조하거나,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임’이다. 불교의 계, 즉 사찰계는 이러한 일반적인 개념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사찰계는 ‘돈을 각출해 이자를 불리는 일’에 그치지 않고 궁극의 목적을 불교적 가치 실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찰계는 정토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결성하거나, 가람의 신축·보수, 경전 간행, 또는 각종의 예배대상물을 조성하기 위해 조직했다. 즉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수행과 신앙심을 증진하거나 사찰 재산, 전각, 혹은 의식 용품 등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한 모든 조직체를 총칭한다. 그러므로 사찰계는 최종 목적이 불교신앙으로 귀결된다. 단순한 이익단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적 목적을 전제로 조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던 향도(香徒)나 고려시대의 보(寶), 결사(結社) 등도 넓은 의미에서 사찰계에 포함된다.

 

사찰계의 시작

1564년(명종 19) 무렵, 사명당 유정(1544~1610)이 봉은사에서 갑회(甲會)를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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