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B급 스님들] 종이 만드는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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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B급 스님들] 종이 만드는 스님들
  • 오경후
  • 승인 2023.08.23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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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으로 가중된 스님들의 고된 승역僧役
남해 화방사(花芳寺). 남해 망운산 자락에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시 왜병에 의해 불탔으며 후에 중창됐다. 화방사는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봉안한 충렬사(忠烈祠)를 수호하는 사찰이었다.

제지(製紙), 사찰의 종이 생산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광해군 즉위년(1608), 대동법(大同法)이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됐다. 당시 백성은 군역(軍役)의 문란, 하급 관리나 상인들이 공물(貢物)을 나라에 대신 바치고 대가로 백성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아내던 방납(防納)의 폐단으로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다. 

대동법 시행으로 그동안 현물과 노역으로 부담했던 의무를 쌀(대동미大同米)로만 대신할 수 있었다. 백성들은 다른 부역을 부담하지 않아도 됐고, 국가의 토목공사나 공물 납부 시에는 그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양란 직후 실시된 대동법의 운영은 여러 논란과 한계가 드러났지만, 백성들이 대동법의 실시를 청원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왕릉을 조성하거나 사신(使臣) 접대, 종이 생산과 납부 같은 불시에 발생하는 부역으로 그 수요를 예측할 수 없는 경우 부득이하게 백성이 동원됐다.

대동법 시행은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줬지만, 스님들의 부담은 가중되고 고통 또한 심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조선 건국 초기에도 스님들은 도성(都城) 건설에 동원됐고, 중앙관청에 소속돼 기와나 옹기를 굽거나 서책을 만들고 환자를 치료하는 부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왜란과 호란 이후처럼 그 유형이 광범위하지 않았다. 전란 전에는 사찰 소유 토지 또한 면세의 혜택을 받아서 불교계를 위협할 정도로 심화되지는 않았다. 스님의 부역은 일정한 주거지 없이 상가(喪家) 등을 찾아가 의식(衣食)을 해결하는 스님들만이 담당했을 뿐이었다. 

전란 이후 스님들의 종이 생산과 납부는 전국 대부분의 사찰에서 담당할 정도로 광범위해졌다. 많은 양의 종이가 청나라 조공품(朝貢品)으로 보내졌고, 국가 자체의 수용도 증가했다. 중국을 왕래하는 연행사신(燕行使臣)은 일반적으로 매년 3차례 정기적으로 왕래했는데, 이때 방물지(方物紙, 중국 청나라에 바치는 종이)는 백면지(白綿紙) 6,000권, 세폐대호지(歲幣大好紙) 2,000권, 소호지(小好紙) 3,000권을 합해 총 1만 1,000권을 보냈다. 1643년(인조 21)에는 백면지(白綿紙)와 후백지(厚白紙)를 합쳐 총 8만 7,000권을 보냈으며, 1649년(인조 27)에는 백면지·상화지(霜華紙), 세폐 및 동지(冬至) 등에 쓰일 수량을 합쳐 총 2만 2,590권을 보내야 했다. 1650년(효종 1) 10월과 12월에는 각기 2만 8,500권과 8만 7,000여 권을 합쳐 총 11만 5,500권을 생산해야 했다.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가 호전되면서 방물지의 수량도 점차 감소했지만, 한 해에 10만 권을 초래한 사례는 전무후무했다. 

두 차례 전쟁 이후 종이를 생산하던 사찰이 확대되고 사찰이 납부할 종이의 양이 증가한 것은, 관에서 종이를 생산하던 조지서(造紙署)의 역할이 붕괴된 측면도 있지만 대동법 시행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종이를 생산하는 승역(僧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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