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B급 스님들] 가마 멘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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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B급 스님들] 가마 멘 스님들
  • 이경순
  • 승인 2023.08.2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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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여藍輿 타고 금강산을 오르다
강세황, <부안유람도권>, 미국 LA 카운티미술관 소장. 강세황의 아들 강흔이 부안현감(1770~1772)으로 있을 때 강세황이 변산 일대를 유람하며 그린 그림이다. 강세황의 『표암유고』에 실린 글을 보면, 스님들이 멘 가마를 타고 일대를 유람했음을 알 수 있다. 

“가마를 짊어진 중이 큰 소리를 지르며 질주하자 가마 장대가 소나무에 
부딪히기도 하고 중의 발은 깊은 눈에 빠지기도 했다. 얼음은 미끄럽고 돌은 날카로워 기울어 넘어지려고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견여(肩輿)를 멘 중을 
여러 차례 주의시켰지만 천천히 걸을 수 없었다.”
- 강세황,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 『표암유고(豹菴遺稿)』 중에서

 

남여(藍輿)를 멘 승려들

조선 후기에 산수 유람은 크게 유행했다. 특히 금강산 유람의 대열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기에 금강산을 비롯한 각지의 명승지에 대한 시와 기행문, 그림이 홍수를 이뤘다. 유람 무리 중에는 고령자도 있었고, 장기간 먼 곳 여행을 감행한 이들도 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 유람객들은 사찰을 산수 유람의 거점으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유람을 위한 노동력으로 승려를 활용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로승(指路僧)’이다. 지로승은 산길 안내 역할을 맡은 승려를 말한다. 이들은 유람자들을 산중 곳곳의 명소로 안내했다. 산길 안내는 금강산과 같은 볼거리가 많은 탐승지에서는 필수적이었다. 유람자들은 이들 승려에게서 길 안내를 받고 그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지명과 지명의 유래 등을 유람록에 기록할 수 있었다. 

승려들은 승경(뛰어난 경치)에 대한 안내와 더불어 특수한 교통수단을 제공했다. 조선시대 여행 기록에서 ‘남여(藍輿)’, ‘견여(肩輿)’, ‘담여(擔輿)’라는 단어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은 단순한 형태의 가마를 가리키는 것으로 특히 산을 여행할 때 쓰였던 교통수단이다. 산에서 이 가마를 메는 이들은 승려들이었다. 가마를 메는 데 동원된 승려를 ‘남여승(藍輿僧)’이라고 불렀다. 

박제가(朴齊家)는 그의 묘향산 여행기인 「묘향산소기(妙香山小記)」(1769)에서 가마의 재질과 구조, 안전한 운행 방법을 설명했다. 가마의 띠는 삼으로 엮어 만들고, 멍에목은 등나무를 휘어 만든다. 운행에 있어서는 앞사람은 끌고 뒷사람은 따라가며 앞이 들릴 때는 앞을 낮추고 위로 들고, 숙일 때는 앞을 들고 뒤를 낮추는 방법으로 안전을 도모한다고 했다. 

가마를 짊어지는 데는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어깨가 필요했다. 두 사람 어깨만으로 긴 여정을 온전히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교대를 위한 예비 가마꾼도 함께 움직였다. 따라서 사대부 여행객 수에 비례해 몇 배의 남여승이 동행하게 됐다.

남여승이 특히나 눈에 많이 띈 곳은 금강산이었다. 몇몇 이들은 금강산에 남여가 등장한 시기가 1572년 금강산을 찾은 양사언(楊士彦)부터였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16세기 초반 주세붕(周世鵬)이나 이황(李滉)의 기록에 이미 견여가 등장했다. 소백산에 올랐던 이황은 “말에서 내려서 걷다가 다리가 떨리면 견여를 탔으니 번갈아 가며 그 힘을 쉬게 하려는 것이었다. 실로 산을 유람하는 묘한 방법이요 명승지를 구경하는 좋은 기구였다”며 견여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이렇게 남여가 산행에 이용되기 시작한 16세기 초는 연산군과 중종 대 승단이 무너지고 폐불 위기를 맞았던 시기다. 16세기 중반 문정왕후에 의해 일시적으로 승단 재건의 기회를 맞았지만, 왕후가 죽자 불교에 대한 유생들의 비판이 심하게 들끓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람을 위해 동원되는 남여승의 등장과 확산은 하락한 불교의 위상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남여승의 존재만으로 불교세의 하락과 승려의 지위 전반을 단정할 수는 없다. 16세기 후반 청허 휴정(淸虛休靜)과 사명 유정(四溟惟政)과 같은 고승이 출현했고 사찰에서 수많은 불서가 간행된 것은 이 시기 조선 불교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승단은 출가로 이뤄진 종교 공동체이기도 했지만, 승단 내부 구조에서는 양반에서 노비까지 출가 시점의 다양한 신분 체계가 그대로 작동하기도 했다. 승단에는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불서에 통달하거나 승직을 소지한 상층 승려들도 있었지만, 승군·의승으로 동원되거나 가마를 메는 승려들도 존재했다. 따라서 일부 승려의 모습으로 당대 승단의 형편과 불교세를 단정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사찰별로 권역을 나누다 

16세기 초 기록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남여승은 17세기 이후 더욱 확산했다. 유람객들은 출발할 때 나귀나 말을 타고 이동해 사찰 입구에서 미리 준비된 남여로 갈아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승려들을 동원한 남여의 이용은 유람자의 연령과 체력의 한계로 제한됐던 이동 범위를 크게 넓혀 줬다. 김창흡(金昌翕)이나 권섭(權燮) 같은 이름난 유람가들이 노년기에 산수 유람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 남여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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