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써로게이트(Surrogates, 2009)>는 한 과학자가 자신의 신체장애를 극복하고자 뇌파로 조종할 수 있는 인공의체를 개발하면서 시작한다. 영화 제목인 ‘써로게이트’는 인간의 존엄성과 기계의 무한한 능력을 결합해 만든 대리 로봇을 말한다. 인간은 특수장치를 머리에 쓴 채 집 안에 누워있고, 대리 로봇이 인간 대신 출근하고 클럽에도 놀러 간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인간의 뇌에 직접 연결된 로봇이 오감을 인간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써로게이트가 공격을 당해 그 주인인 인간도 함께 죽는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기술적 수단에 의한 인간 향상을 꿈꾸는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우리 몸 전반에 걸쳐 기술적 향상을 꾀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몸의 일부 기능에 그치지 않고 몸의 근본적인 부분에까지 적용된다. 그들의 목표는 노화나 인지적 결함 극복은 물론 신체 능력과 두뇌 능력의 비약적인 향상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잠재력을 생물학적 우연의 한계에 가두지 않고, 기술이 허용하는 선에서 무한 확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이 무한히 발전한다는 가정이 성립한다면, 인간의 잠재력 또한 무한하다고 말할 수 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인간 향상을 위해 주목하는 기술도 제한이 없다. 인지 능력 향상과 관련해서 스마트 약물이나 뇌과학에 관심을 갖는데, 그것은 현재 수준에서도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좀더 멀리 내다본다면 인공지능과 로봇을 활용하는 방안이 고려될 것이다. 인공지능의 능력을 인간에게 접목할 수 있다면, 즉 진보된 로봇, 이를테면 안드로이드의 신체 능력을 인간이 직접 이용할 수 있다면, 스마트 약물이나 유전자 편집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얻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인간과 기계의 빈틈 없는 결합을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꿈꾼다.
뇌파로 움직이는 로봇 팔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현재 수준의 기술로 말하면 뇌-기계 인터페이스(Brain-Machine Interface), 약자로 BMI라고 한다. 이것은 컴퓨터를 매개로 인간과 기계를 연결하는 기술이다. 컴퓨터는 인간과 연결된 기계 장치를 통해 인간의 뇌파를 읽고, 이를 해석해서 다시 기계장치로 보낸다. 이렇게 해서 뇌파로 기계 장치를 움직이는 것이다. 중간 단계를 생략해서 보면, 마치 우리가 자신의 의지로 팔을 움직이듯이 머릿속 생각으로 기계 팔을 움직이게 된다.
뇌와 기계를 처음 고안한 이는 미국의 신경과학자 필립 케네디(Phillip Kennedy)이다. 1998년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목 아랫부분이 완전히 마비된 환자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BMI 장치를 이식했다. 케네디는 거듭되는 실패를 딛고 마침내 환자가 생각만으로 컴퓨터 화면의 커서를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에는 독일에서도 BMI 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닐스 비르바우머(Niels Birbaumer)가 두피에 부착해 뇌파를 읽어내는 장치를 매개로 생각만으로 컴퓨터 화면에 글씨를 쓰는 데 성공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BMI 실험들이 성과를 냈다. 뇌에 머리카락 굵기의 가느다란 탐침 96개를 꽂아서 뇌파를 포착해 로봇 팔을 움직이게 하는 실험이 성공한 것은 물론, 이 실험을 1,000km 떨어진 곳으로 뇌파 신호를 전달해 로봇 팔을 움직이는 방식으로도 시도해서 성공했다. 뇌파로 기계를 움직이는 방식이기 때문에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면 거리의 제한도 넘어설 수 있다.
2004년에는 뇌에 이식할 수 있는 반도체 칩인 브레인게이트(BrainGate)가 개발되었다. 존 도너휴(John Donoghue)는 25살의 사지마비 환자의 대뇌 운동피질에 1mm깊이로 브레인게이트를 심었는데, 이 환자는 9개월의 훈련 끝에 생각만으로 컴퓨터 커서를 움직여 전자우편을 보내고 게임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BMI에서 환자의 훈련이 중요한 이유는, 뇌파로 기계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계가 구분할 수 있는 특정 파장의 뇌파를 일정하게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고, 해당 뇌파를 기계의 특정한 움직임과 짝을 지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지 팔을 들어 올린다는 생각만으로는 기계가 움직이지 않는다. 도너휴의 환자는 나중에 로봇 팔을 의수로 이식했다고 한다.
2008년에는 BMI 기술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해이다. 미국의 신경과학자 앤드류 슈워츠(Andrew Schwartz)는 원숭이가 로봇 팔을 움직여 꼬챙이에 꽂혀 있는 과일을 빼먹는 장면을 연출했는데, 이것은 컴퓨터 화면의 커서를 움직이는 것보다 진보한 기술이다. 원숭이가 이 동작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원숭이 뇌에 이식된 전극을 통해 수집한 신호를 3차원 공간 정보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화면은 2차원이지만 현실 세계는 3차원이다. 우리가 실제로 몸을 움직이는 것은 3차원 공간에서이다. 슈워츠의 실험을 통해 비로소 두뇌 신호를 실제 운동으로 전환하는 BMI 기술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BMI 연구는 좀더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 방향을 찾아가고 있다. 특히 의료용으로 활용하는 사례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생각만으로 움직이는 휠체어는 뇌파 측정 장치를 부착한 두건을 쓴 이용자의 생각으로 휠체어의 방향과 운동을 조절한다. 이 장치를 통해 신체 마비가 심한 사람도 독립적으로 이동할 수 있다.
사이보그 인간의 출현
인간과 기계 결합의 미래는 사이보그(cyborg)가 될 것이다. 사이보그는 기계 장치와의 결합으로 향상된 인간을 말한다.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유기체(organism)의 합성어인 이 용어는 1960년에 등장했다. 맨프레드 클라인즈(Manfred Clynes)와 네이선 클라인(Nathan S. Kline)이 함께 쓴 「사이보그와 우주」라는 글에서였다. 1970년대 우리의 안방극장을 지배한 TV 외화 시리즈인 <600만 불의 사나이> 주인공 스티브 오스틴과 1980년대 영화 <로보캅> 주인공 알렉스 머피가 바로 사이보그이다. 머피는 머리를 제외한 전신이 로봇이었는데, 더 이전에 만들어진 <600만 불의 사나이>의 오스틴은 인간의 몸과 기계의 이음새 없는 완벽한 연결을 상상했다.
영국의 아방가르드 예술가인 닐 하비슨(Neil Harbisson)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인류 최초의 사이보그이다. 흑백 이외에는 어떤 색깔도 지각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색맹 증상을 타고난 하비슨은 색깔을 소리의 진동으로 재해석하는 센서를 개발해 머리에 이식했다. 센서는 안테나 형태로 두개골에 외과적으로 이식되었는데, 영국 정부는 인식된 안테나를 포함한 사진을 하비슨의 여권 사진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하비슨은 인류 최초의 사이보그가 된 것이다.
하비슨의 사례를 기술을 이용해 결함을 메운 것 정도로 보아서는 부족하다. 그것은 향상을 목적으로 한 신체의 변형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우리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의 향상이다. 하비슨의 안테나는 그에게 부족한 색깔 지각 능력을 보통 사람의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넘어선다. 그는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색깔을 느끼며 보통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색깔도 감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비슨은 자외선과 적외선도 느낄 수 있으며, 인터넷 연결을 통해 다른 센서 또는 위성으로부터 색깔 감각을 수용할 수 있다. 이것은 색깔 지각에 있어서 지금껏 인류에게 없었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예이다.
하비슨의 안테나는 새로운 인류의 능력 탄생을 가리킨다. 하비슨은 그에게 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색깔을 느끼고 경험하며,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을 안테나를 매개로 해서 느낀다. 하비슨은 자칭 ‘아이보그(eyeborg)’의 성공에 영감을 받아 우리 몸의 더 많은 부분을 기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감각기관의 확장 혹은 향상이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받는 날이 와야 한다고 믿으며, 인간 몸에 대한 사이보그적 재설계를 주창하는 사이보그주의를 지지한다.
하비슨은 인간의 모든 감각이 한계 없는 기술적 변형에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솔라 크라운(Solar Crown)이라는 시간 감각을 감지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이것은 일종의 시간을 시각화하는 장치이다. 회전하는 열점이 하비슨의 머리 주위를 24시간 주기로 공전하는데, 이마의 중앙에서 열점을 느낄 때는 영국 런던의 정오 태양시(경도 0˚)이며, 오른쪽 귀에서 열점을 느낄 때는 미국 뉴올리언스 정오(경도 90˚)이다. 하비슨의 목표는 시간 환상을 만들어 아인슈타인의 시간 상대성 이론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몸에 관한 서양적 사고의 확장
BMI나 사이보그화는 생물학적인 우리의 몸을 확장하는데, 다른 편에서 보면 우리를 몸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 몸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목표는 몸에 대한 서양적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통적으로 서양 사상은 몸을 마음보다 열등한 것으로 취급했다.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은 영혼 혹은 마음이고, 몸은 부차적인 것 내지는 부정적인 것으로 여겼다. 서양의 전통적인 인간관은 이원론이다. 플라톤(Platon)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로 보았다. 그런데 영혼과 육체는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대립한다. 영혼은 이데아, 즉 진리와 영원의 세계에 속하고 육체는 현상, 즉 오류와 무상의 세계에 속한다. 영혼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육체는 방해가 될 뿐이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는 것은 영혼의 정화, 즉 육체와 결합되어 있는 영혼이 육체적인 요소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인간의 본질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데 있으며, 육체는 기계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생각하는 능력인 이성만이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고, 인간의 몸이든 동물의 몸이든 신체 기관은 얼마든지 기계적으로 구현할 수 있으며, 그래서 기계와 다름이 없다고 설명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 역시 우리 몸 가운데 기계적으로 구현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본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몸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몸을 전통적인 질서와 관념으로부터 해방하려 했다.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는 소비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제의 대상은 몸이 아니라 영혼이라고 말한다.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현대 자아 정체성의 축을 이루는 것은 몸이며, 소유자의 노력과 각성으로 몸을 만들고 다듬는 양식이 삶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대적 사상은 몸을 타고난 자연물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에 따라 만들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형성했다.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라고 한 『효경』의 내용은 인간의 몸이 자연적이며 운명적이고 변형 불가능한 것임을 가정하지만,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몸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한다. 우리의 몸은 우연적이며 변형 가능하고 인공적으로 만들어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술에 의해 몸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알게 되었으며, 몸은 자유의 한 영역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몸에 대한 불교적 시각
몸과 마음을 별개로 파악하고, 몸을 열등한 것, 혹은 문제의 근원이 되는 것으로 이해한 서양과 달리 불교는 몸과 완전히 구분되어 별개로 존재하는 영혼 같은 것을 상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의 과정은 정신 과정에 의존하고, 정신 과정은 몸의 과정에 의존하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본다.
인간은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요소(오온)의 복합체이다. 색은 몸을 구성하는 요소 일체를 말하고 수상행식은 정신 작용 일체를 가리킨다. 붓다는 몸과 마음이 따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불이론적(不二論的) 입장을 지켰다. 한때 붓다는 감각적 욕망을 극단적으로 억압하는 고행주의 신봉자였지만, 일방적인 욕망의 억압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명상에 들어가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다.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는 방법은 육체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육체적 욕망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다. 붓다는 감각적 욕망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나치게 억압하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 붓다가 강조한 것은 감각적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붓다는 감각적 욕망에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의복, 음식, 좌구(坐具), 의약품을 꼽고, 그것들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여기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것들로 인해서 탐욕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들 자체를 멀리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적절한 의복과 음식, 좌구, 의약품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의학적으로 활용된 BMI는 상실된 몸의 욕망을 회복시킴으로써 욕망의 존재로서 인간의 삶을 다시 가능하게 만든다. 상실된 몸 혹은 장애를 지닌 몸은 욕망을 적절하게 추구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몸의 장애로 좌절된 욕망은 욕망에 대한 갈망을 강화하고, 결국 몸에 대해 집착하게 하며, 괴로움을 만들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BMI는 상실된 욕망을 다시 회복시키고, 왜곡된 욕망을 바로잡음으로써 욕망의 건강한 추구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교는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 몸의 변형, 궁극적으로 신체성의 극복을 지향한다. 기술이 우리의 신체성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불교는 기술을 통해 신체성을 보완하는 쪽을 바라보는 듯하다. 기술로 신체성을 대체하는 것은 욕망의 소멸이 아니라 더 많은 기술, 더 많은 기계에 대한 욕망을 불러오지 않을까.
이상헌
서강대 전인교육원 교수. 저서로는 『융합시대의 기술윤리』, 『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과학과 불교』 등이 있다. 「붓다의 시선으로 본 인공지능」, 「칸트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포스트휴먼」 등 논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