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먼 시대의 불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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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 시대의 불교는?
  • 이상헌
  • 승인 2021.04.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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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국정토]
출처 2012년 개봉한 옴니버스영화 <인류멸망보고서>.

트랜스휴머니스트들 가운데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양자의 결합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생명윤리학자인 제임스 휴즈(James Hughes)를 비롯해 불교에 친화적인 몇몇 연구자들이 포스트휴먼 시대의 새로운 인간상에 주목하며 이른바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Buddhist transhumanism)’을 주창한다. 이들의 주장은 지난 호까지 살펴보았던 도덕공학과는 다르다. 이들은 기술적 수단을 통한 향상을 도덕적 영역에 국한하지 않는다. 이들이 생각하는 인간 향상(human enhancement)의 목표는 인생의 온갖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깨달음의 성취다. 

 

인간의 존재론적 고苦의 근원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파악하는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은 ‘삶은 고(苦, duhkha)이며, 일체중생은 누구나 노력을 통해 고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인간 존재와 인간사는 연기의 산물이다. 연기는 싯다르타가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은 진리다. 일체의 존재와 현상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근원이 연기다. 세상 모든 존재와 사건은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며 서로 의존하고 연관되어 있다. 만물과 만사는 인연화합의 산물이다.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지금, 여기’의 사물과 현상 일체는 직접적 원인 혹은 내재적 원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因)과 간접적 원인 혹은 외재적 원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연(緣)이 작용하여 생겨난다. 과학적 용어를 빌리면, 인은 사물과 현상을 발생시키는 다양한 원인에 해당하고 연은 그러한 인과작용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조건, 환경 등에 해당한다. 어찌 되었든 만물과 만사는 인연의 산물이며, 이 인연의 그물은 과거로부터 한없이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점은 일체가 연기한다는 것이지 지금 여기의 ‘이것 혹은 저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시각각 경험하는 ‘이것 혹은 저것’은 상호 연관된 무한한 변화상의 한 단면 혹은 작은 부분에 속할 뿐이다. 일체의 존재와 현상은 그것을 발생시킨 갖가지 인과 연의 상호 작용을 통해 생겨나는데, 그러한 작용이 끊임없이 지속할 것이므로 어떤 사물이든 어떤 현상이든 그대로 고정된 것이 없다. 다시 말해 무상하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의 골자다. 

불교는 연기의 법칙을 토대로 인생의 문제를 네 가지 핵심 진리, 즉 사성제로 전한다, 고집멸도(苦集滅道)로 표현하는 사성제는 인간의 존재론적 괴로움과 그에 대한 해법을 담고 있다. 인간 존재는 누구나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五蘊, skandha)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오온으로 인해 인간은 신체적 및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즐거움을 얻고 욕구를 만족시키면 행복할 거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와 반대다. 즐거움이나 만족을 추구하는 삶은 괴로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현생의 즐거움이나 만족감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즐거움은 또 하나의 즐거움을 탐하게 하고, 하나의 만족은 더 큰 만족을 갈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저 수미산을 모두 금으로 바꾸어 놓는다고 해도 단 한 사람의 탐심도 채우지 못한다”고 말했다. 

고성제가 인생의 참모습이 생로병사의 고통에 얽매여 있음을 말한 것이라면, 집성제는 그러한 고통의 원인을 밝혀준다. 인생의 고통은 무지, 욕망,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리고 멸성제를 통해 모든 욕망의 근원인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시킨 이상적인 경지, 즉 열반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도성제는 생의 모든 고통을 소멸시키고 열반에 들어 참된 자유를 얻는 방법이 있음을 말한다.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의 공통점

불교는 인생의 존재론적 고통을 극복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제시한다. 팔정도는 원시불교의 경전인 『아함경』에 등장한다. 이것은 중생이 온갖 고통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 열반의 세계로 들어서기 위한 실천 수행의 여덟 가지 길을 밝힌 것이다. 정견(正見)은 올바로 보는 것, 정사(正思) 혹은 정사유(正思惟)는 올바로 생각하는 것, 정어(正語)는 올바로 말하는 것, 정업(正業)은 올바로 행동하는 것, 정명(正命)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 정근(正勤) 혹은 정정진(正精進)은 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정념(正念)은 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정정(正定)은 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이상 여덟 가지 올바른 수행의 길이 팔정도다.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인 마이클 라토라(Michael LaTorra)는 팔정도를 두 개의 범주로 구분한다. 정견부터 정명까지 앞의 다섯 정도를 행위 규율 혹은 도덕적 규율로 분류하고, 정정진에서 정정까지 뒤의 세 정도를 최종 목표에 이르는 길에 관한 것으로 분류한다. 수행의 최종 목표는 윤회의 사슬을 끊고 열반에 드는 것이다. 앞의 다섯 정도를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고, 다음 생에 더 나은 삶을 갖게 될 수 있다. 크게 보면, 앞의 다섯 정도의 수행은 뒤의 세 정도의 수행을 위한 기본 요건이다. 앞의 다섯 정도의 수행을 통해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이룰 수는 없다. 그것은 뒤의 세 정도의 수행을 통해서 도달될 수 있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 사이에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양자는 모두 인간의 현재 상태를 완성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를 고정된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현재의 인간 존재를 불완전한 것으로, 미완성의 것으로, 변화 가능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불교의 목표와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라토라는 이 목표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말하자면, 인간 삶의 공동체적 조건과 개인적 조건을 향상하는 것, 인간이 직면하는 온갖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 인간성을 더 높은 상대로 고양하는 것이다.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정신적 한계를 극복해 온갖 악덕과 심리적 결함으로부터도 해방되어 행복한 삶을 사는 게 바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존재의 양상이다.

현재의 상태를 더 나은 상태로 고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도 있고, 이런 모든 것을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점에서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은 일치한다. 불교는 윤회의 사슬에 갇힌 현재의 삶을 미완의 것으로 보고 열반에 이르는 수행을 말한다. 비슷하게 트랜스휴머니즘은 현재의 인간을 자신의 잠재력을 거의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존재로 보며, 인간 스스로 역량으로 인간 존재의 조건을 경이롭고 대단히 가치 있는 것으로 고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천상의 피조물’ 에피소드의 한 장면. 영화는 로봇이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 설법까지 하는 모습이 담겼다. 출처 2012년 개봉한 옴니버스영화 <인류멸망보고서>

 

기술에 대한 방편적 이해의 가능성

현재 인간의 조건에서 비롯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행복하고 덕스러운 삶을 살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에 관해서는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 사이에 차이가 있다. 불교에서는 부단한 수행을 말한다. 반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진보된 과학과 기술을 언급한다. 신경과학, 유전공학, 인지과학, 나노기술 등이 제공하는 기술적 수단으로 인간의 신체 능력과 정신 능력에 지속적인 향상을 꾀하는 방식이 현재의 인간 존재를 넘어설 수 있다고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주장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변형하는 방식으로 고통의 극복과 행복의 획득을 추구한다. 이것은 진보된 과학과 기술을 인간의 몸에 직접 적용함으로써 가능하다. 스마트 약물을 복용하거나 유전자의 변형을 꾀하거나 신경보철을 활용하거나, 아니면 인간과 컴퓨터를 결합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시도가 가능할 것이다. 반면 불교는 도덕적 수양, 자연과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에 관한 지혜의 탐구, 명상 수행 등 인간의 마음을 닦는 방식을 제안한다. 그래서 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교는 비슷한 목표를 가진 듯하지만,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대립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이 대립적이지 않고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 방법과 트랜스휴머니즘의 향상 방법이 상호보완적이라고 주장한다.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 방법과 기술적 수단에 의한 향상 방법을 결합하여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우리는 불교의 방편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는 수행을 위해 효과적인 방법 강구를 장려했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방편을 매우 중요하게 다뤘는데, 중생에게 가르침을 설하기 위해 적절하고 효과적인 길을 찾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유연함을 특별히 잘 보여주고 있는데, 가르침을 받는 각각의 사람이 자신만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느낄 만큼 각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문헌으로 보면, 대승불교의 초기 경전인 『십지경(Daśabhūmika Sūtra)』에서 10바라밀 가운데 일곱 번째 바라밀로 방편 바라밀(upaya)을 올려놓았고, 『법화경』 「방편품」은 대승불교의 방편 사상의 근본적인 이념을 전하는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방편에서 방은 ‘방법’을 의미하고 편은 ‘적용’을 뜻한다. 방편은 ‘가까이 다가가다’, ‘도달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한 말이며, 중생이 불교적 목적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을 의미한다. 방편은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데, 수행의 과정에서 수행의 성공을 위해 활용되는 다양한 수단이나 도구를 의미하기도 하고, 가르침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붓다는 중생이 생로병사 고통을 여의고 윤회를 끊도록 가르침을 펼쳤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붓다의 가르침 역시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과학과 기술 역시 고통의 극복과 깨달음 획득을 위한 방편으로 여길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는 수행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을 활용하는 것을 삼간다고 그 어디에도 명시하고 있지 않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오히려 불교에서는 과학과 기술을 방편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장려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달라이 라마는 어디에선가 불교의 목표가 “서양 과학의 목표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인류에 공헌하고 더 나은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소프트웨어 향상과 하드웨어 향상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불교의 전통적 수행 방식인 요가(yoga)와 명상(meditation)을 자신들의 방식인 기술적 수단에 의한 향상과 비교하곤 한다. 캐나다의 생명윤리학자이자 미래학자인 조지 드보르스키(George Dvorsky)는 요가와 명상을 가리켜 소프트웨어 향상(software enhancement)의 양식이라고 표현했다. 트랜스휴머니즘에서 활용하는 하드웨어의 향상에 대비시킨 듯하다. 드보르스키의 표현이 함축하는 바는 이런 것으로 보인다. 

“일체의 고로부터 해방되어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 바로 현재의 인간 존재와 조건에서 더 나은 단계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향상인데, 불교의 전통적인 방법이 소프트웨어적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방법으로 하드웨어적인 것이 추가될 것이다.”

요가는 여러 가지 생리적 및 심리적 향상을 불러온다고 알려졌다. 우리는 요가로 강인함, 참을성, 균형, 신체 인식 및 운동감각 의식 등 향상을 꾀할 수 있다. 명상은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분을 개선하고 정신을 맑게 한다. 인지 기능을 향상하고 행복감을 증폭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꾸준한 명상 수행으로 자기 생각과 감정을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점차 어떤 관념이나 느낌과 동기를 어떻게 하면 의식적으로 사유하고, 그 사유에 따라 어떻게 해야 더 잘 행동할 수 있는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이러한 효과들을 과학기술의 수단으로 얻을 수 있으면 어떨까?

캐나다 댈하우지대학의 철학 교수인 앤드류 펜턴(Andrew Fenton)은 신경 약물을 불교적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것이 불허되지 않으며, 윤리적으로도 전혀 부당한 게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메틸페니데이트와 같은 신경 약물을 일상적인 마음챙김(mindfulness)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경 약물과 같은 기술적 수단을 방편으로 삼는 것을 허용하는 공리적 이유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펜턴은 더 나아가 미래의 신경 약물들과 여러 기술적 수단이 마음챙김을 돕는 것은 물론 행복을 향상하고 덕을 증진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교는 서양의 대표적인 종교들과 달리 신을 상정하지 않는다. 연기법의 우주적 진리를 토대로 세워진 불교는 심신의 수행으로 개인과 공동체가 더 나은 상태를 향해 지속해서 나아갈 수 있으며, 궁극에는 고락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과 인격적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주장처럼, 기술적 수단에 의한 향상이 불교의 이런 목표를 이루는 데 적절하고 유용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래서 포스트휴먼 시대에 불교는 인간의 고양된 삶을 위한 종교로 더 힘을 얻게 될까? 

 

이상헌
서강대 전인교육원 교수. 저서로는 『융합시대의 기술윤리』, 『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과학과 불교』 등이 있다. 「붓다의 시선으로 본 인공지능」, 「칸트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포스트휴먼」 등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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