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본성·한계의 인류 해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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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본성·한계의 인류 해방학
  • 이상헌
  • 승인 2021.03.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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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국정토]

‘불확실성’이라는 단어보다 우리 시대를 잘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없을 듯하다. 근대정신의 핵심인 개인의 자유 증진으로 세상은 광범위하게 다양성을 수용하고, 일반화된 상대주의는 하나의 지배적인 가치를 떠올리기 어렵게 했다. 과학기술은 발전을 가속하고 그 성과를 유례없이 신속하게 현실에 적용하면서 인류 문명과 인간 생활에 대한 지배력을 날로 키워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인류의 가까운 미래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시대, 혹은 기술지배의 시대에 불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이 연재를 기획한 동기다.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친화적인 불교에서 불확실성의 세계, 혼돈의 세상에서 방향을 찾을 단서 하나를 발견하는 것이 연재의 목표다. 21세기를 지배할 신생 기술을 통해 인류 발전과 인간 진화를 꿈꾸는 트랜스휴머니스트들 가운데 불교 신도들이 있다. 그들을 중심으로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을 결합하려고 시도하는 연구자 무리가 생겼다. 이른바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이다. 이것이 이 연재를 기획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다. 연재에서는 주로 트랜스휴머니즘과 서양 사상과 비교하며 불교적 가르침의 참뜻을 되새겨볼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과 도덕 공학

“우리는 인간성에 내재한 잠재력이 대부분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이 말은 ‘트랜스휴머니스트 선언문’에 포함된 문장으로 트랜스휴머니즘 정신을 잘 드러낸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트랜스휴머니즘은 과학기술에 의존해 우리가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지적인 운동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국내에서 융합기술로 지칭되며 언론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되었던 최첨단 기술들의 힘을 빌리면 인류의 새로운 진화 단계가 열린다고 믿는다. 기술을 통해 진화한 새로운 인류는 포스트휴먼(posthuman)이라고 한다. 

포스트휴먼 논의는 국내에서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진행 중이다.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인류 미래상을 추론하는 낙관적 전망과 비관적 예측이 엇갈리는 상황 속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철학은 미래 예견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포스트휴먼 논의에 철학자들의 참여는 거기에 미래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인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포스트휴먼 담론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물음에 관련한다. 전통적으로 우리가 이해해온 인간성(humanity)을 넘어선 ‘새로운 인간성(posthumanity)’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인간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어떻게 변경해야 하는가? 인류가 더 나은 존재가 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새로운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것으로 정말 가능할 것인가? 

다양성과 상대성을 보편적 가치의 기준처럼 생각하는 오늘날의 세계는 과학기술에 대한 인류의 의존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 덩달아 삶의 방식과 가치 결정에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적용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세계는 가까운 미래도 예측하기 힘들 만큼 불확실한 세상으로 바뀌고 있으며, 과거처럼 하나의 지배적 가치가 아닌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며 충돌하고 갈등하는 세상이 되고 있다. 필자는 지금 우리가 과거 서양에서 중세가 몰락하고 근대적 세계가 등장할 무렵 지식인들이 직면한 물음에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이 물음에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답변을 제시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트랜스휴머니즘 용어는 줄리안 헉슬리의 책인 『계시 없는 종교(Religion without Revelation)』(1957)에서 처음 사용했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헉슬리는 이 책에서 ‘인류가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지칭했다. 헉슬리가 오늘날 트랜스휴머니스트들과 같은 생각을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과학기술을 잘 활용하면 인류가 자연이 부여한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는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휴먼(human)에서 포스트휴먼으로, 또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서 호모 데우스(Homo Deus)로, 이것이 인류가 나아갈 방향이라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목표 개념으로 설정한 포스트휴먼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목소리가 있는데, 『슈퍼인텔리전스』 저자 닉 보스트롬의 말을 빌려 포스트휴먼을 표현하자면 이렇다. 현재 인류에서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 이상의 지능 수준이고, 무한히 연장된 수명과 젊음을 누리며, 자연적 욕구나 기분 혹은 심적 상태에서 성인 버금가는 탁월한 통제력을 지니고, 심지어 신체적인 능력마저 초인적인 존재가 포스트휴먼일 것이다. 포스트휴먼이 어떤 존재일지는 다양하게 그려질 수 있다. 어떤 기술에 의존하느냐, 기술이 어떻게 활용되느냐, 인간을 향상시키는(human enhancement)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등 물음에 어떤 답변을 내놓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어쨌든 포스트휴먼은 현재 인류의 생물학적 한계를 기술로 극복한, 새로운 단계로 진화한 인류일 것이다. 

선구적인 트랜스휴머니스트 맥스 모어는 트랜스휴머니즘을 “생명 증진의 원칙들과 가치들에 의해 인도되어 과학기술에 의해 현재 인간의 형태와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이라는 지능 생명체의 진화를 지속하고 가속하려는 생명의 철학”이라고 규정했다. 모어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여러 면에서 근대의 휴머니즘과 닮았다고 말한다. 이성과 과학을 존중하고 인류의 진보에 대한 강한 믿음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양자가 같다고 본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인간 완성에 믿음을 지니고 있으며, 기술로 신체적 및 심리적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믿는데, 이런 맥락에서 캐리 울프는 트랜스휴머니즘을 “휴머니즘의 심화(an intensification of humanism)”라고 말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생로병사 고통으로부터 해방이 목표다. 생명의 기본 구성요소를 제어하는 생명공학과 나노기술 등 새로운 과학기술을 믿기 때문이다.

 

마음에 따라 만들어갈 새로운 인류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인간의 완전한 자기실현, 신체적·정신적 향상, 생로병사 고통으로부터 해방 등을 목표로 삼은 데는 믿는 구석이 있다. 파인 세라믹스 등 신소재나 바이오테크놀로지,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 우주 산업, 제5세대 컴퓨터 등 유망한 첨단 기술로 명명하는 새로운 과학기술(emerging technology)을 믿는다. 분자 이하의 규모에서 물질을 다루는 나노기술, 생명의 기본 구성요소를 제어하는 생명공학, 정보의 흐름과 연결을 연구하고 세상 모든 사람과 사물을 연결하는 정보통신기술, 사람의 마음(지능과 감정)을 연구하고 인간 뇌의 신비를 밝혀나가는 인지과학과 신경과학 등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과학이나 기술과는 다른 것이다. 

400년 전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라고 외치며 과학과 기술의 토대 위에 새로운 세상, 즉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베이컨은 아담의 추방으로 잃어버린 자연의 지혜와 통제력을 회복해 지상에 낙원을 복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연을 향한 끝없는 탐구(과학)와 그 성과를 현실에 적용(기술)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오늘날 선진 산업국가는 베이컨을 꿈을 좇은 결과다. 

그런데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상상하는 유토피아는 베이컨의 유토피아와 성격이 전혀 다르다. 포스트휴먼 유토피아는 완전히 새롭게 창조되는 세상이다. 의존하는 과학기술과 자연을 대하는 관점 차이가 트랜스휴머니스트들과 베이컨의 차이를 만든다. 

양자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자연을 대한다. 베이컨에게 자연은 창조된 것이고 주어진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는 원래부터 그렇게 있었다. 우리는 그 자연에 터전을 잡고 산다. 그래서 자연을 아는 게 중요하며, 아는 만큼 우리는 그 속에서 더 잘 살 수 있다. 

반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믿는 21세기 최첨단 기술들은 자연을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자연은 편집할 수 있고 재설계할 수 있는 대상, 다시 말해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자연을 도구로 삼고, 자연에서 얻은 것으로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는 기구를 만드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연 자체를 만들고 창조하는 길로 접어들고 있다. 

나노기술은 분자 이하의 수준에서 물질을 제어해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는 물질을 만들어낸다. 생명공학, 특히 합성생물학은 생명의 기본 요소들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생명을 재설계하고, 나아가 우리가 지구의 자연에서 발견할 수 없는 생명체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인공지능은 원래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그 작동 방식은 인간의 지능과 같지 않다. 만일 강한 인공지능을 추구하는 이들이 염원하는 인간 뇌의 거의 모든 기능을 모방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인간 지능과 다른 또 하나의 지능, 다시 말해 자연이 준 지능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 지능이 될 것이다. 

나노기술이 창조하는 새로운 물질들, 생명공학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생명들, 그리고 인지과학과 인공지능 연구가 실현할 인공지능…. 그 어느 것도 자연 그대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 인간이 만든다. 근대 과학기술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고 우리 자신을 자연에 종속시키려 했다면 신생 기술들은 맥락이 확연히 다르다. 우리가 상상하고 믿는 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자연을 대하고,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해방하려고 한다. 근대 과학기술의 바탕에 깔린 자연관과 신생 기술의 밑바탕에 깔린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이렇게 다르다. 

포스트휴먼은 이런 신생 기술들이 있을 때 가능하다. 따라서 포스트휴먼 유토피아는 전적으로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상이다. 과거에 있었던 영광된 세상을 복원하는 게 아니며, 그 어디에도 원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따라, 우리가 믿는 대로 만들어질 세상이다.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했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세상이며 세상 저편의 세상일 것이다. 

 

인류 진화는 끝나지 않았다

트랜스휴머니즘은 호모 사피엔스를 인류 진화의 초기 단계로 규정하고, 현재 우리가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중이라는 게 핵심 주장이다. 인류학적으로 현생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약 1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등장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인류는 생물학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없다. 뇌의 크기, 신체 기관의 구조, 형태적 특징 등 모든 면에서 인류는 지난 10만 년 동안 생물학적 진화를 겪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지나간 그 긴 세월 동안 정체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류는 새로운 진화 방식을 택했다. 1만 년 전 인류는 작물을 경작하고 야생 동물을 가축화하며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더불어 문명을 만들어나갔다. 생물학적 진화가 멈춘 지점에서 인류는 문화적 진화를 시작한 것이다. 인류는 언어를 만들어 지식을 축적해 교육으로 후대에 전승했다. 인류는 축적한 지식을 기반으로 마을을 조성하고 도시를 건설했으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문학을 탄생시켰다. 놀이를 운동경기로 발전시키고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했다. 붓다, 공자, 소크라테스가 생존하던 시대의 인간과 현재의 인간 사이에 생물학적 차이는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지식과 문화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예컨대, 현재 우리나라의 10살짜리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일과 기원전 500년 전의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천양지차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어린이의 생물학적 뇌가 과거보다 진화한 것은 아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인류가 문화적 진화에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진화를 시작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바로 기술을 통한 진화다. 나노기술, 생명공학, 인지신경과학 등의 신생 기술이 제공하는 수단으로 이뤄질 새로운 진화 방식은 문화적 진화로도 극복하지 못했던 인류의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인류의 문화는 인간의 자연 본성에 기초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인간의 생물학적 속박을 넘어서려는 노력이다. 특히 도덕과 지혜는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능과 욕구를 억제하고, 이상적으로는 자유자재로 제어하려는 노력이다. 이런 노력으로 인간은 단순한 자연적 존재, 즉 짐승에 머물지 않고 인간적 존재가 된다. 물론 자연적 존재의 본성으로부터 해방, 신체 구속으로부터 해방, 심리적 본성으로부터 해방은 문화 증진과 교육으로는 온전히 달성할 수 없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바로 이것, 즉 인간의 자연 본성으로부터 해방이라는 목표를 기술의 힘을 빌려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연 본성은 인간을 세 가지 한계 속에 가두었다. 죽음과 무지, 고통은 인간이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이며, 인간의 조건이다. 우리는 각자 생명의 한계와 싸우며 생존하고,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애쓴다. 또한 삶은 마주하는 무수한 고통(신체적 고통, 심리적 고뇌, 온갖 불만과 두려움)에 맞서는 과정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에라도 굴복할 때 우리의 삶은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무거운 불행을 짊어진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한계 때문에 비롯하는 이 세 가지 인간의 한계로부터 인간이 해방되는 세상을 꿈꾼다.    

 

 

글. 이상헌
서강대 전인교육원 교수. 저서로는 『융합시대의 기술윤리』, 『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과학과 불교』 등이 있다. 「붓다의 시선으로 본 인공지능」, 「칸트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포스트휴먼」 등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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