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길을 나섰다. 목적지가 멀었고 예정한 시간은 촉박했다. 처음 다비식을 마주했던 스님의 맏상좌와 차담 약속이었다. 또 인연이 닿질 않던 암자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10여 년 전에도 그랬다. 정확히는 2010년 3월 12일, 법정 스님 다비식 전날 송광사로 향했다. 첫 다비식 취재였고, 설렘과 긴장이 교차했다.
홀린 게 맞다. 어렵게 닿은 시절인연이었다. 피곤함도 잊고 새벽길을 달려 불일암에 도착했다. 사진으로만 봤던 불일암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시선은 벌써 법정 스님의 자취를 뒤적였다. 손님을 맞이하던 다실 수류화개실, 스님이 직접 심고 지금은 그 품에 안긴 후박나무, 즐겨 앉았던 ‘빠삐용 의자’, 볕 잘 드는 채마밭, 해우소…. 생각대로 담박했다.
나무 의자 위에 놓인 방명록에 법정 스님과의 작은 인연과 뒤늦은 방문의 죄송한 마음을 적었다. 그때였다. 따뜻한 볕 아래 한 스님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눈인사를 건넸다.
“지금 햇살이 가장 좋아요.”
스님은 수류화개실의 창을 열고 안으로 들이치는 햇살을 자랑(?)하며 밝게 웃었다. 법정 스님의 첫 번째 상좌, 불일암 암주 덕조 스님이다.
사진. 유동영
10년 정진 당부는 선물이자 보상
덕조 스님은 직접 내린 뜨거운 커피와 다과로 허기와 한기를 달래줬다. 1983년 송광사에서 출가한 스님은 행자 시절 법정 스님을 시봉하고 계를 받았다.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개산하자 주지를 맡았다. ‘주지를 맡지 않는다’는 은사 법정 스님의 원칙에 맏상좌가 12년 동안 절 살림을 도맡은 셈이다. 2009년 훌쩍 불일암으로 내려온 다음 해, 공교롭게도 2010년 입적한 법정 스님은 맏상좌에게 특별한 당부를 남겼다.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
덕조 스님은 13년째 불일암에서 정진 중이었다.
Q. 법정 스님의 유언에 특별히 맏상좌를 향한 당부가 있었는데
“큰 보상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나이에 길상사 주지를 맡으면서 나 자신을 살필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요. 정신없이 살았죠. 자신을 향한 갈증을 채우라는 선물이에요. 은사스님께서는 공부든 참선이든 모든 지 10년 이상은 해야 인정하십니다. 사실 10년이라는 기간은 숫자에 불과하지요. 불일암에서 자신을 살펴보라는 메시지입니다. 이곳은 은사스님의 모든 영혼이 담긴 곳입니다. 모든 유산을 남기신 거죠.”
Q. 10년 넘게 불일암에서 정진하면서 어떻게 아침을 열고 저녁을 닫았나
“출가수행자의 삶이 특별한 게 있나요? 은사스님께서는 대중이 있으나 없으나 자기질서를 지키라고 하셨어요. 잘 때 자고 공양할 때 공양하고 예불할 때 예불하고 정진할 때 정진하는 것뿐입니다. 자칫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라고 여길지 모르나, 자기질서를 놓치면 혼자 정진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리듬대로 살아요. 은사스님께서도 그러셨고, 저도 그렇습니다.”
Q. 법정 스님의 법향이 배인 불일암에서 10년 넘게 정진하면서 스님의 살림살이에 달라진 게 있었을 것 같다
“은사스님께서 불일암에서 많은 글을 쓰셨는데, 시시각각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고 느끼고 글로 표현하셨어요. 사실 우리는 그날이 그날인 줄 알지만 한순간도 그날이 그날인 적은 없습니다. 정진하다 창살을 넘어오는 햇살만 보면 따뜻함이 가슴에 확 닿습니다. 그러면 가슴 안에서 법희가 막 피어오릅니다. 환희심이죠. 스스로 느끼는 겁니다. 해는 맨날 뜨고 지는데 못 느끼면 충만감이나 법희는 없습니다. 아마 은사스님께서도 그런 충만감으로 글을 쓰셨을 겁니다. 불일암, 이 공간이 주는 메시지가 참 많습니다. 은사스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입니다.”
Q. 덕조 스님은 뭘 느끼고 사유하는지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빛을 지혜라고 한다면 그림자는 어둠이고 무명이죠. 무명 속에 살다 어느 순간, 빛이 들어오면 주변은 한순간 환해집니다. 환희심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면 다 소용없죠. 매일 같은 공간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일상, 그날이 그날이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연이 주는 혜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끼느냐에 따라 삶의 많은 부분이 달라집니다.”
Q. 법정 스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불일암을 많이 찾는데 정진에 불편함은 없는지
“모든 상황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괴롭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인내력, 그러니까 인욕 바라밀을 닦는 소중한 인연이 되는 것이죠. 은사스님 뵈러 온 분들입니다. 부처님 친견하러 왔는데 시자가 함부로 할 수 있나요?”
법정 스님의 맏상좌라는 경책
덕조 스님은 행자 시절 법정 스님을 시봉했다. 30여 년 전 시절인연은 숙명이었을지 모른다. 출가 전 법정 스님의 책을 만난 인연이 송광사로의 출가로 이어졌고, 행자 생활하며 시봉까지 했으니 말이다. 불일암에서 청소하고, 밥 먹고, 기도하는 일상 속에 발견한 찰나의 기록들을 엮은 덕조 스님의 『마음꽃을 줍다』에는 은사와 상좌의 인연이 소상히 담겼다.
시퍼런 억새풀 같은 법정 스님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엄했단다. 법정 스님은 평소 수행을 하면서 상좌를 두지 않고 주지를 맡지 않으며 두루마기를 입지 않는다는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상좌를 두지 않은 까닭에 송광사 행자들은 3개월씩 돌아가면서 불일암에 우편물을 배달하고 도량 청소를 하는 등 법정 스님을 시봉했다. 덕조 스님도 차례가 됐고, 기간이 끝날 무렵 “오늘은 시봉이 끝나는 날입니다”라고 말씀 올리자 법정 스님은 “행자님!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원주스님께 말씀드릴 테니 계속 올라오십시오”라고 답했다.
많게는 하루 아홉 번, 평균 두 번 이상 큰절 송광사에서 불일암까지 오르내리는 게 행자 덕조 스님에겐 큰 즐거움이었다. 1년가량 행자 생활을 마친 스님은 법정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을 때를 잊지 못했다.
법정 스님이 괴팍하고 까다로운 이미지도 있지만, 상좌 덕조 스님이 느끼는 은사는 달랐다. 정이 많고 따듯했다. 첫 선물은 삭발 면도기와 만년필, 두 번째 선물이 카메라였다. 무명초를 걷어내면서 출가초발심을 되새겼고, 어설프지만 사진을 찍으면서 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Q. 법정 스님과 맺은 은사와 상좌 인연이 궁금하다
“송광사는 은사와 상좌 인연을 맺을 때 상좌가 은사를 택하고 은사가 허락을 해야합니다. 제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은사스님을 시봉했습니다. 행자 때 계속 시봉하면서 허락받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장담할 수 없었어요. (법정 스님은)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었으니까. 큰절에서 은사스님 정하라고 말미를 줄 때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께 삼배 올리고 ‘은사스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받아주십시오’라고 했죠. 허락 안 하시면 될 때까지 행자를 더 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Q. 어떻게 그런 각오를 하게 됐나
“법정 스님은 말과 행동이 같은 분이셨습니다. 앞뒤가 다르지 않았죠. 시봉하면서 많이 야단도 맞고 했지만, 제게 보여주는 모든 언행이 같은 출가수행자셨습니다. 이런 분이라면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Q. 법정 스님의 맏상좌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러울 것 같다
“왜 부담스럽지 않겠어요(웃음). 워낙 큰 어른이십니다. 그런 부담감에 더 열심히 삽니다. 워낙 오랫동안 모셔서 ‘이럴 땐 뭐라고 하실까’ 하는 게 떠오릅니다. 저를 바르게 살게 하는 힘입니다. (육신이) 곁에 계시든 안 계시든, 불일암에 녹아 있는 은사스님과 소통하며 살고 있습니다.”
Q. 불일암에서 혼자 지내지만 자유로움이 나태함으로 이어질 수 없는 이유인가
“은사스님 가르침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은사이신 법정 스님이 세간출세간에서도 인정하는 큰 어른이 아니었다면 부담감이 덜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웃음). 어떤 분인지 다 아시잖아요. 법정 스님을 잣대로 제게 적용하는 거죠. 큰 부담이자 경책입니다.”
‘맑고 향기롭게’ 퍼지는 무소유의 향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제정신을 똑바로 차릴 줄 알아야 한다. 제정신을 차리려면 자기 마음을 찾고 닦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 집 문단속은 잘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기 마음은 단속할 줄 모르는 것 같다.”
2021년 새해 첫 달, ‘맑고 향기롭게’ 첫 번째 소식지에 실린 ‘법정 스님 잔소리’다. ‘맑고 향기롭게’는 우리 마음과 세상 그리고 자연을 두루 맑고 향기롭게 가꾸며 살려는 이들의 순수 시민단체다. 법정 스님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모여 1994년 발족했다.
이 ‘맑고 향기롭게’에서 발행하는 소식지가 달라졌다. 법정 스님의 뜻을 산뜻한 디자인과 새로운 글로 단장했다. 법정 스님의 당부대로 종이를 눈곱만큼도 버리지 않은 제본으로 24철 서첩 형식으로 소식지가 나왔다. 화학용 풀을 쓰지 않았고, 화학 약품 코팅도 하지 않았다. 잘 젖고 잘 찢어지고 빨리 썩는다. 불필요한 말을 버리고 할 말만 싣고 환경도 지킨다는 의지다. 특히 덕조 스님이 간직해온 법정 스님의 미발표 육필 원고를 세상에서 처음 싣기 시작했다. ‘법정 스님 잔소리’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법정 스님의 미발표 육필 원고는 매월 소식지에 실릴 예정이다. 은사스님 뜻을 받아 2020년 4월 ‘맑고 향기롭게’ 5대 이사장 소임을 맡은 덕조 스님의 오랜 계획이었다.
Q.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 소임을 맡아 새로운 일들을 시작했다
“소중한 육필 원고를 혼자만 보고 소장하긴 너무 아까운 글이었습니다. 은사스님을 시봉할 때 세상이 어지러우면 기자들이 제일 먼저 와 메시지를 요청했습니다. 살아계신다면 지금도 그랬겠지요. 지금 코로나로 많은 이들이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미발표 원고 중에는 이 시대에 맞는 글이 너무 많았어요. 은사스님이 살아계신다면 이런 말씀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글을 첫 번째 소식지에 실었습니다. 오래전에 써놓은 글인데 지금 상황에 잘 맞았습니다.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겁니다.”
Q.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무슨 말씀인가
“국민 1인당 소득을 올랐지만 우리는 만족하고 있나요? 소득이 더 낮았던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불만족입니다. 그때도 환경이 파괴되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형태만 달라졌을 뿐 상황은 같습니다. 여러 환경적인 요소는 달라졌지만 삶의 본질은 달라진 게 없는 거죠. 욕구는 채울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은사스님 글의 핵심이 소욕지족이에요. 스스로 만족하면 충분합니다. ‘법정 스님 잔소리’라는 제목을 달아 조금이라도 위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Q. ‘맑고 향기롭게’의 향후 행보와 스님의 원력은
“간혹 불일암에 선생님과 학생들이 옵니다. 당신은 알고 왔지만 학생들은 법정 스님을 모릅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메아리가 엷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일암에 있는 동안 법정 스님과 세상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던 겁니다. 여기서 할 일을 찾았습니다. 법정 스님 법문 영상을 짧게 편집해 공개하는 등 미디어로 꾸준히 메시지를 전할 생각입니다. 소식지에 미공개 육필 원고를 싣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법정 스님과 세상의 연결고리에 매듭을 묶는 게 제 원력이자 수행입니다.”
Q. 계속 불일암에서 정진할 생각인가
“네. 이 좋은 곳을 두고 어디 가겠습니까(웃음).”
코로나가 주는 아픔을 크게 공감한 덕조 스님은 무소유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오해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갖지 말라는 게 아니라 불필요함을 덜어내는 연습이자 수행이 무소유라고 했다. 과도한 화석에너지 소비, 육류 소비, 플라스틱 제품 사용 등 모든 게 선을 넘었다는 경책이었다. 신발장에 많은 신발을 쌓아두고 정작 2~3켤레만 꺼내 신는다면 무엇이 불필요한 것인지 스스로 돌이켜보라고 스님은 조언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하다”는 법정 스님 말씀이 떠올랐다. 덕조 스님 말씀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 가르침이 더 사무친다. 그랬다. 여전히 덕조 스님은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다. 차담이 끝나갈 점심 무렵, 법정 스님을 품은 후박나무의 그림자가 소리없이 불일암에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