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등無等等, 광주 무등산] 광주천에 남겨진 불교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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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등無等等, 광주 무등산] 광주천에 남겨진 불교의 흔적
  • 임석규
  • 승인 2024.01.2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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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천光州川의 탑과 절터

빛고을 광주의 역사와 문화 형성에 기여한 중요한 환경요소는 무등산과 광주천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전남의 진산이자 광주를 상징하는 호남정맥의 중심 산줄기인 무등산에는 증심사, 원효사, 규봉사, 만연사 등 천 년 역사를 가진 사찰을 포함해 많은 불교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광주천은 영산강의 지류지만 무등산과 함께 광주 시민의 삶과 생명,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하천이다. 그렇기에 광주읍성 또한 광주천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영산강과 연결된 광주천을 통한 다양한 인적·물적 교류가 있었고, 광주천을 중심으로 사찰 유적도 다수 존재한다. 도심 천변의 사찰들은 수행 위주의 산사와 달리 지역과 지역을 잇는 길목에 자리하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며 새로운 신앙과 학문이 들고 나는 창구 역할도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광주광역시 소재 절터는 약 50곳이다. 그중 절반은 영산강 서쪽인 광산구에 있으며, 나머지 절반이 영산강 동쪽에 위치한다. 광주시 동구에서 남구, 서구를 거치며 광주시를 관통하는 광주천과 가까운 곳에도 몇 곳의 사지가 남아 있다. 광주천변에 있었던 사찰과 그 터에 남아 있는 문화재들의 현황을 알아보자.

 

성거사지 오층석탑(보물). 탑에서 사리함이 나왔다.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된 성거사지 오층석탑 사리함은 각 면에 보살상을 조각했고, 밖으로는 사천왕이 사리를 지키고 있다. 

성거사지(聖居寺址) 오층석탑

성거사지는 광주공원 안의 빛고을시민문화회관 서쪽에 세워진 (전)성거사지 오층석탑(보물, 서오층석탑) 일원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창건과 폐사에 관련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거산에 있다”라고만 기록돼 있다. 이러한 간단한 기록과 사지에 남아 있는 오층석탑으로 미뤄 볼 때, 성거사는 적어도 석탑이 건립된 고려시대에 창건돼 16세기까지는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범우고』에는 “今廢(금폐)”라고 기록돼 있어, 『범우고』가 편찬된 1799년 이전에 폐사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지형은 거북이를 닮았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광주 사람들은 상서로운 동물인 거북이가 광주의 정기를 안고 있다고 믿어, 거북이의 목에 해당하는 위치에 사찰과 오층석탑을 세워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오층석탑만 남아 있고 성거사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석탑 주변에서 소량의 기와 조각만이 확인된다. 

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를 올려놓은 형태다. 기단의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 모서리 기둥)와 탱주(撐柱, 중간 기둥)가 조각됐다. 탑신부는 1층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의 몸돌(1매 석)로 조성했다. 1층 탑신은 석재가 상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하부는 4매의 석재를 ‘田’ 자형으로 결구했으며 상부는 1매의 석재를 올렸다. 2층 탑신 윗면에서는 1961년 해체 수리 당시 사리장치가 발견돼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전체 높이 7.61m의 이 석탑은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지산동 오층석탑(보물). 백천사라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일대에는 법원과 관공서가 들어섰으며, 바로 옆 연화사에서 석탑 보존 활동을 하고 있다.

지산동 오층석탑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보물)이 서 있는 일대는 예전에 백천사(柏川寺)가 있던 곳이라 전하고 있으며, 현재는 연화사가 들어서 있다. 석탑은 아래부터 이중으로 된 기단부와 오층의 탑신부, 노반과 복발, 찰주로 이루어진 상륜부로 구성돼 있다.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모서리마다 우주를 새기고, 중앙에 2주의 탱주를 새겼다. 탑신부의 초층 옥개석 밑에는 5단의 층급받침이 있고, 나머지 옥개석 하단에는 4단의 층급받침이 표현됐다. 석탑은 1955년에 해체 복원했다. 이중기단에 새겨진 기둥의 형태는 고식에 가깝지만, 전체적으로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서 안정감은 떨어져 보인다.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경으로 추정된다.

 

재명석등(在銘石燈)과 석탑 부재. 옛 전남도청 입구에 있다. 

대황사지(大皇寺址)의 철불과 석등

대황사는 광주 동구 광산동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부지 내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사찰이다. 대황사는 1966년에 발간된 『광주시사』에서 처음으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데, 시사에는 이 일대가 11세기에 창건돼 구한말에 폐사된 대황사지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대황사지라고 특정할 만한 실질적인 물증은 확인되지 않았다. 

현재 대황사 부지는 조선 초기에는 광주읍성의 관아가 있었고, 후에 전남도청이 들어섰던 곳이다. 그래서 대황사가 읍성 내 관아 인근에 있었다는 의견도 있으나 그건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읍성과 사찰이 동시에 존재했다고 보기보다는 순차적으로 같은 장소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다.

대황사와 관련된 문화재로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미륵불입상, 재명석등, 석탑재 등이 있다. 이들 중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현재 광주 증심사 비로전에 봉안돼 있고, 미륵입상은 광주역사민속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전하는데, 현재 십신사지 석불을 의미하는 듯하다. 

석등에는 화사석(火舍石, 등불을 밝히는 부분)을 받치고 있는 8각 기둥에 6cm 내외 크기로 명문(銘文)이 음각돼 있다. “임금이 오래 살고 나라가 편안하기를 바라며 무진년에 석등을 세웠다”라는 내용이며, 명문이 새겨져 있어 ‘재명석등(在銘石燈)’이라 부르고 있다.1093년에 만들어진 나주의 서문석등(西門石燈)과 형식이 유사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무진(戊辰)’이라는 간지와 연관해 1028년, 1088년, 1148년 중 한 시기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측하며, 현재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다.

재명석등은 기둥이 팔각 모양이고 연꽃이 새겨져 있다. 기둥과 옥개석, 상륜부 모두 남아 있지만 부재들의 석질이 동일하지 않고 전체적인 비례도 달라, 후대에 보수됐거나 다른 석등 또는 승탑 등의 부재가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상륜부는 하나의 돌에 복발과 앙화(仰花, 솟은 연꽃 모양의 장식)를 새기고 그 위에 보주를 얹어 놓은 형태라 석등의 상륜부라 하기엔 일반적이지 않다. 

재명석등 옆으로 5개의 석탑 옥개석이 함께 있다. 그런데 이 옥개석들의 층급받침이 1~3층은 5단, 4층은 4단이며, 5층은 6단으로 제각각이다. 아마 2기 이상의 탑재가 혼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십신사지(十信寺址)

광주지역에서 가장 눈여겨 볼만한 불교문화재가 바로 이 십신사지 석비다. 십신사(十信寺)의 본래 위치는 북구 임동 92번지 일대로 추정되는데, 현재 주택가로 개발돼 관련 유구(遺構) 및 유물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다. 이곳이 십신사지로 알려진 것은, 현재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세워져 있는 십신사지 석비와 십신사지 석불이 처음 보고됐을 당시 위치가 옛 광주농업고등학교였기 때문이다. 광주농고가 1975년에 이전하면서, 현재 그 부지는 주택가로 변했다. 

십신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나, 조선 전기인 1481년경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현의 북쪽 5리 평지에 있다. 범어로 쓴 비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한편 『동국여지지』(1656)와 『범우고』에는 십신사가 폐사되고, 범자비만 남아 있다고 기록됐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십신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세기경에는 폐사된 것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경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을 보면, 석비는 마을이 보이는 경작지에 있었는데, 귀부는 흙에 덮여 있는 상태였으며 석불은 집 앞에 있는 큰 나무 밑에 우뚝 세워져 있었다. 1916~1917년경 작성된 현지 조사서에 의하면, “광주농업학교 안의 논 가운데에 비석이 있는데, … 귀부(龜趺)와 비개(碑蓋)가 있다. 총 높이는 약 2장 정도이다. 같은 경내에 미륵상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적어도 1914년경에는 석비와 불상이 근거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신사지 석비. 남한에 있는 고려시대의 유일한 불정존승다라니 석경당이다.

석비와 불정존승다라니 신앙

석비는 전체 높이 5.25m로 화강암을 사용해 귀부와 비신, 옥개석으로 나눠 조성했다. 옥개석과 비신의 상단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석질의 특성상 풍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십신사지 석비의 전면에는 외곽에 방형 구획선을 넣고, 상단에 범어의 ‘옴’ 자를 새겨 넣었으며, 그 아래에 가로로 ‘대불정존승다라니당(大佛頂尊勝陀羅尼幢)’이라는 제호를 써놓았다. ‘불정존승다라니’는 부처님의 특징을 보여주는 32상 중 정수리 부분의 육계(肉髻)를 불격화(佛格化)한 것이다. 즉, 부처님의 공덕 중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지혜를 인격화한 것이다. 

이 다라니는 죄를 소멸하거나(멸죄滅罪), 목숨을 늘리거나(연명延命), 액난을 제거하는 등 효험이 많고 내세는 물론 현세의 이익까지 강조하는 내용이 담긴 경전이다.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 실크로드 주변 지역, 넓게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권 내에서 신앙됐다. 중국에 전래된 『불정존승다라니경』은 여러 스님이 번역했는데, 가장 널리 애용된 번역본은 불타파리(佛陀波利)가 번역한 것이다.

경전의 내용은 다라니의 공덕과 봉안 방법에 관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다라니를 절 입구의 당간(幢竿)에 깃발처럼 걸거나, 아니면 아주 높은 산이나 누각에 안치하거나 탑 내부, 또는 네거리에 탑을 세우고 그 안에 다라니를 안치하도록 하고 있다. 보거나 옷깃이 스치기만 해도 그 공덕을 받을 수 있는 경전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탑을 세우는 신앙은 요나라(遼, 916~1125)에서 불탑을 세우는 배경이 됐으며, 이후 돌에 경전을 새겨 넣은 거대한 석경당(石經幢) 제작의 계기가 됐다. 

불정존승다라니 신앙은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는데 요나라가 건국되기 전 발해에도 있었다. 현재 일본 시가현 오오쯔시(大津市)에 있는 이시야마데라(石山寺)에는 정관 3년(861), 발해 사신 이거정(李居正)이 전해준 ‘가구영험불정존승다라니기(加句靈驗佛頂尊勝陀羅尼記)’가 소장돼 있다, 9세기 중엽 발해가 불정존승다라니 신앙을 일본에 전해준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10세기에 건국된 요나라 존승다라니 신앙의 전통 또한 발해로부터 비롯됐을 가능성이 있다. 

불정존승다라니 신앙은 고려에도 전해졌다. 현재 북한 지역에 고려시대에 조성된 두 개의 석경당이 전해진다. 하나는 황해남도 해주시 청풍동에, 또 하나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보현사에 남아 있다. 보현사 석경당이 가장 크고, 조형적으로도 뛰어난데 원래 평안북도 피현군 성동리 불정사에 남아 있던 것을 옮겨놓은 것이다. 두 개의 석경당은 남한지역에는 전하지 않는 독특한 유형의 고려시대 석조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대불정존승다리니당’라는 명문이 있는 십신사지 석비는 남한에선 유일한 불정존승다라니 석경당이다. 현재는 비면의 마멸이 심하여 ‘옴’ 자 문양 이외의 글씨는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지만, 1978년 조사보고에서 탁본을 통해 그 내용이 일부 판독됐다. 그리고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 ‘정사(丁巳)’라는 간지가 새겨져 있어서 오랫동안 석비의 건립연대를 1437년(세종 19) 혹은 1497년(연산군 3)으로 추정해 왔다. 그런데 최근 석비의 귀부 조각 기법, 거북의 등에 새겨진 귀갑문의 ‘왕(王)’ 자 음각, 불정존승다라니 신앙의 전래와 성행, 불정심인 도상의 표현 기법, 옥개의 치석 수법 등을 고려할 때 조선 전기보다는 고려 후기에 조성됐다는 견해가 있어서 주목된다. 

 

십신사지 석불. 석비와 더불어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에 나란히 서 있다. 

석불(石佛)

십신사지 석비 옆에 석불이 조성돼 있다. 이 불상이 처음 있던 곳이 대황사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석비와 석불의 재질이 동일하고, 조각 기법이나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애초부터 십신사지 유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석불의 높이는 450cm이고, 팔각형 돌기둥에 불상과 대좌를 간략히 조각했다. 

불상의 최하단부에는 팔각기둥 형태가 남아 있고 그 위에 연꽃 모양의 대좌가 조각됐다. 대좌의 양 측면에는 화불이 양각돼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구체적인 도상은 확인이 어렵다. 불상은 손과 옷주름 정도만 얕은 부조로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이 입고 있는 옷의 형태는 통견이고, 하체에는 수직으로 내려뜨린 옷자락과 발의 표현이 비교적 뚜렷하게 좌우대칭으로 표현됐다. 부처님의 손 모양은 오른손을 들어 꽃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가사를 잡고 있다. 

이 불상은 일반적인 불보살상에 비해 토속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표현됐는데 예산 삽교 석조보살입상(보물),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보물)과 유사하다. 조성 시기는 십신사지 석비와 같은 고려 후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진. 유동영

 

임석규
동국대와 일본 무사시노미술대에서 불교미술사를 공부했다. 현재 불교문화재연구소 수석연구관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불교문화재를 조사·연구하고 있다. 「渤海の二佛並坐像」, 「발해 밀교신앙의 전개」, 「한국건칠불상의 광학적 조사현황」 등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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