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등無等等, 광주 무등산] 5·18민주화운동과 김동수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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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등無等等, 광주 무등산] 5·18민주화운동과 김동수 열사
  • 이재수
  • 승인 2024.01.2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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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민으로 오신 무등의 부처님
문빈정사 일주문 등지문(等持門)
무등산 초입에 자리한 문빈정사는 지선 스님이 주석하면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보루가 됐다. 앞에는 ‘무등산 노무현길’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무등산 규봉암에서 원각사로

무등산은 젊은 시절 어머니 품처럼 언제나 날 품어주던 마음의 고향이었다. 무등산으로 가는 버스에 오를 때는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무등산 오르는 길 초입에 있는 문빈정사에서 토요일마다 조선대 불교학생회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광주지부 법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억새가 흔들리던 장불재 너머 규봉암을 찾는 건 큰 기쁨이었다. 병풍처럼 우뚝 솟은 주상절리 광석대 아래, 규봉암 법당 앞에 앉을 때는 세상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조선대 후문에서 가방을 뒤지면서 불심검문을 하던 형사들도, 방패와 몽둥이를 휘두르던 전투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고 뛰어가던 친구의 뒷모습도, 매캐하던 최루탄 연기며 그 모든 것들이 아득해졌다. 얼음을 깨 찬물에 세수하면서도 규봉암에 앉아 있는 것이 좋기만 했다.

1987년 5월 학원민주화 투쟁으로 강의실의 문이 굳게 닫히자 무등산 규봉암으로 향했다. 아침 예불 후 우뚝 솟은 규봉암 바위에 올라 좌선하면서 맞이하던 아침 햇살은 그리 따뜻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3,000배를 올리고 나서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아침.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도 모두 저 안개 너머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겨드랑이가 시원해지고 내가 무언가 된 기분이 들었다.

정적을 깨고 원각사 법당에 최루탄이 터지고 난리가 났는데 뭐하냐는 전화를 받기 전, 모든 것은 평안했었다. 일륜 스님을 모시고 급히 광주 시내 원각사 대웅전으로 향했다. 5월 18일 밤 5・18 추모법회를 하고 있는데, 사복경찰이 군홧발로 법당에 난입해 사과탄(사과 모양의 최루탄) 수십 발을 투척하고 참석자들을 무차별 구타와 함께 연행했다고 했다. 대웅전에서 절을 하는데 눈물 콧물이 쏟아졌다. 법당에까지 쳐들어와 던진 최루탄 파편에 다쳐 손에 붕대를 감은 금강 스님을 보자, 애써 외면했던 현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5월 27일 원각사 경찰난입 및 불교탄압규탄 범불교도대회가 열리기까지 매일 원각사 규탄법회에 참석했다. 그때 원각사에서 속칭 ‘광주비디오’를 처음 봤다. 여태껏 배워서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른 진실을 목도하자 마음속에서 무등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광주사태는 북한 간첩의 사주로 일으킨 폭동이 아니고,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한 시민항쟁이었으며, 광주 시민들은 폭도가 아니고 계엄군의 총탄에도 끝까지 저항했던 민주시민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광주학살의 주범들이 여전히 권좌에 앉아 9시 뉴스를 장식하고 있었다. 내가 진실을 외면하고 규봉암에 편안히 앉아 있을 때, 광주 시내 한복판 원각사가 군홧발에 짓밟혔다고 생각하니 분노와 회한의 눈물로 며칠 동안 머리를 쥐어뜯었다. 

망월동 5・18 묘역에 처음 갔었을 때, 선배들은 작년까지만 해도 5월에 묘역에 오지도 못했고, 건너편 산으로 몰래 와서 쳐다만 보고 갔는데, 이제야 5월 27일 망월동 묘역에 오다니 눈물겹다 했었다. 

그때 처음 한 청년을 만났다. 묘지번호 86번 지광 김동수 열사! 그날 이후 김동수 열사는 내 마음속에 각인됐다. 매년 5월마다 추모제로 만날 때만 떠올리는 선배가 아니라, 김동수 열사가 살고자 갈망했던 그 푸르른 날을 나는 살고 있다는 생각에 늘 ‘동수형이라면 어찌할까’라는 질문이 화두로 자리 잡았다. 

 

보살의 화신 김동수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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