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에 들어온 불교
광주는 삼국 시기에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대에는 무주(武州)로 불렸다. 광주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 23년(940)에 처음으로 사용됐다. 이곳에 불법(佛法)이 전해져 펼쳐진 때는 언제부터였던가?
통일신라 석탑의 백미로 알려진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이 8세기 중엽 경덕왕 대에 건립됐으니 그보다 앞선 7세기 중반, 백제 말기 무진주에 불교가 전래돼 수용됐으리라 짐작된다.
고대의 불교는 국왕을 비롯한 귀족들의 귀의를 받는 왕도 중심의 불교였다. 지방에는 주로 지역의 거점인 평지에 사찰이 건립됐다. 광주에도 8세기 초반 이후 무주의 중심부 평지에 교종(敎宗) 사찰이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9세기 중반 가지산문을 개창한 체징(體澄, 804~880)의 생애를 기록한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보물) 기록에, 체징선사가 보림사에 주석하기 전 무주의 황학난야(黃壑蘭若)에 머물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황학난야가 무주의 어디에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무주도독성(武州都督城) 중심부에 있었던 교종 사찰이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현재 광주 한복판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옛 전남도청) 입구에 있는 8각 석등인 재명석등(在銘石燈)은 고려 시기 광주의 도심에 있던 불교문화재로 주목받는다. 이 석등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등 양식을 하고 있으나, 조각 기법이 섬세하지 않아 보인다. 석등의 가운데 기둥에는 ‘무진(戊辰)’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조각 양식과 관련지어 살펴볼 때 고려 전기에 석등이 조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대황사의 옛터에 남아 있던 석등으로, 이곳 터가 광주 도심부의 평지 사찰이었을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지역의 거점 중심부에 자리를 잡았던 사찰들은 신라 하대(780~935)에 이르러서 점차 도심을 벗어나 무등산에 도량을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기에 광주불교의 도심 사찰로 근본도량 역할을 했을 성거사, 백천사, 십신사, 무량사와 더불어 무등산에는 무량사·천복사·개룡사·원효사·증심사·규봉사·금석암 등 여러 사찰이 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불우조’에 기록돼 있다. 이들 사찰이 고려와 조선 시기에 광주불교를 이끌었던 중심 사찰인 것이다.
이 가운데 증심사, 원효사, 규봉암 세 개의 사찰은 법등이 유지된 전통사찰로서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세 사찰을 중심으로 무등산의 불교문화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증심사(證心寺)
“잣나무는 뜰 앞에 푸르고,
복숭아꽃은 언덕 위에 붉구나.
어찌 반드시 지경 밖에 찾으랴,
다만 둘려 있는 속에서 찾을 것이로다.
막힌 경내에서는 마음도 끝까지 막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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