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등無等等, 광주 무등산] 무등산의 불교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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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등無等等, 광주 무등산] 무등산의 불교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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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1.2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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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지켜온 무등산의 부처님

무주에 들어온 불교

광주는 삼국 시기에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대에는 무주(武州)로 불렸다. 광주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 23년(940)에 처음으로 사용됐다. 이곳에 불법(佛法)이 전해져 펼쳐진 때는 언제부터였던가? 

통일신라 석탑의 백미로 알려진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이 8세기 중엽 경덕왕 대에 건립됐으니 그보다 앞선 7세기 중반, 백제 말기 무진주에 불교가 전래돼 수용됐으리라 짐작된다. 

고대의 불교는 국왕을 비롯한 귀족들의 귀의를 받는 왕도 중심의 불교였다. 지방에는 주로 지역의 거점인 평지에 사찰이 건립됐다. 광주에도 8세기 초반 이후 무주의 중심부 평지에 교종(敎宗) 사찰이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9세기 중반 가지산문을 개창한 체징(體澄, 804~880)의 생애를 기록한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보물) 기록에, 체징선사가 보림사에 주석하기 전 무주의 황학난야(黃壑蘭若)에 머물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황학난야가 무주의 어디에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무주도독성(武州都督城) 중심부에 있었던 교종 사찰이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현재 광주 한복판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옛 전남도청) 입구에 있는 8각 석등인 재명석등(在銘石燈)은 고려 시기 광주의 도심에 있던 불교문화재로 주목받는다. 이 석등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등 양식을 하고 있으나, 조각 기법이 섬세하지 않아 보인다. 석등의 가운데 기둥에는 ‘무진(戊辰)’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조각 양식과 관련지어 살펴볼 때 고려 전기에 석등이 조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대황사의 옛터에 남아 있던 석등으로, 이곳 터가 광주 도심부의 평지 사찰이었을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지역의 거점 중심부에 자리를 잡았던 사찰들은 신라 하대(780~935)에 이르러서 점차 도심을 벗어나 무등산에 도량을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기에 광주불교의 도심 사찰로 근본도량 역할을 했을 성거사, 백천사, 십신사, 무량사와 더불어 무등산에는 무량사·천복사·개룡사·원효사·증심사·규봉사·금석암 등 여러 사찰이 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불우조’에 기록돼 있다. 이들 사찰이 고려와 조선 시기에 광주불교를 이끌었던 중심 사찰인 것이다. 

이 가운데 증심사, 원효사, 규봉암 세 개의 사찰은 법등이 유지된 전통사찰로서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세 사찰을 중심으로 무등산의 불교문화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증심사는 무등산 서쪽 자락에 있다. 통일신라시대 헌인왕 4년(860), 철감 도윤 스님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 만해 한용운 스님 등이 일제에 맞서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지키기는 임제종 운동을 시작했던 사찰이다.

증심사(證心寺)

“잣나무는 뜰 앞에 푸르고,
복숭아꽃은 언덕 위에 붉구나.
어찌 반드시 지경 밖에 찾으랴,
다만 둘려 있는 속에서 찾을 것이로다.
막힌 경내에서는 마음도 끝까지 막히나니, 
말을 잊어야 도가 비로소 통하는 것.
누가 이 절 이름을 지었는가.
묘한 이치를 홀로 깊이 궁리하였도다.”

고려 중기의 유명한 시인 김극기(金克己)가 노래한 무등산 증심사다. 시인은 푸른 잣나무와 붉은 복숭아꽃이 핀 증심사에서 말이 끊어진 진리를 터득하고자, 마음을 맑게 하고 미묘한 이치를 궁리하는 수행 정진의 인연을 말하고 있다. 무신정권의 엄혹한 세속에서 벗어나 마음공부를 통해 현실을 극복해 가는 고려 후기 무인 집권 시기 지식인의 고뇌를 이 시를 통해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무등산 서쪽 기슭에 있는 증심사는 9세기 중엽에 철감선사 도윤(798~868)이 지었다고 전한다. 고려 선종 11년(1094)에 혜조국사가 수리했으며, 조선 세종 25년(1443)에 김방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1년(1609)에 다시 짓고,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쳤다. 1980년대 대대적인 중창사업으로 사찰의 면모를 일신했으며, 근래 취백루(翠栢樓) 등을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증심사 삼층석탑

대웅전 뒤편 오백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증심사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씩으로, 신라 하대~고려 전기 즈음에 주로 나타나는 양식이며,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가 경쾌하게 보인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앙화(仰花, 솟은 연꽃 모양의 장식)만 남아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탑을 세운 시기는 증심사가 창건됐던 9세기 신라 하대로 추측한다.

오백전은 대웅전의 뒤편에 세워진 법당으로, 현재 무등산 증심사에 남아 있는 절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오백나한과 10대 제자상을 모시고 있으며 이 고장 사람들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조선시대에 오백나한을 모신 절은 전남지방에서는 증심사가 유일해, 나한신앙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곳이다. 

증심사 오백전과 나한상. 증심사 오백나한은 1443년, 김방(金倣)에 의해 조성됐다. 정유재란 때 소실돼 1609년 다시 지어졌다. 오백전은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증심사 오백나한상에는 개미의 전설이 내려온다. 김방이 읍내에 있었던 경양방숙 호수 공사를 하던 중, 허물어질 위기에 있던 개미집을 무등산 기슭으로 옮겼다. 당시 일꾼들의 식량을 조성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개미들이 쌀을 물고 왔다. 김방은 개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증심사에 오백나한상을 봉안했다.
증심사 철조 비로자나불(보물).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증심사 비로전에 모셔진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은 통일신라시대에 진리를 상징하는 법신불이다.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섭하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성보로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 증심사로 옮겨온 것이다. 현재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잃어버렸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불상의 손 모양이 왼손이 오른손 검지를 감싸 쥔 형태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형식과는 반대인 것이 특이한 점이다. 이 철불상은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등과 함께 신라 하대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머리에 높은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있는 전체 높이 2.05m의 증심사 석조보살입상은 본래 담양군 남면 정곡리 서봉사 터에 있던 것을 고(故) 현준호 씨가 사재를 들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국보)과 같이 높은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다는 점이 특징인 이 석불입상은 세부 표현이 간략해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증심사 산신각
증심사 산신각 아래 바위에 ‘서석산신지위(瑞石山神之位)’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광주 지역 사찰들은 해마다 ‘산신대재’를 지낸다. 

비로전 뒤 바위 언덕에 ‘서석산신지위(瑞石山神之位)’란 명문이 있다. 무등산의 다른 이름이 서석산인데, 암벽에 무등산의 산신 신위를 새겨 놓은 것이다. 조선 후기 이래 산신각의 산신탱화와 더불어 산신신앙과 궤를 같이하는 유물이다.

 

약사사 역시 증심사와 같이 철감 도윤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초기에는 인왕사라 했으나, 고려시대에 약사암으로 개칭해 현재에 이른다. 증심사에서 새인봉 방향으로 오르는 길에 위치해 있다.  

약사사

약사사는 증심사로 들어가는 길의 오른편으로 약 600m쯤 올라가노라면 약사계곡의 위쪽 분지에 새인봉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무등산에서 한국전쟁의 손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사찰이다. 원래는 인왕사(人王寺)라고 하여 9세기 중엽 철감선사 도윤이 증심사를 창건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고 한다. 또한, 법당에는 신라 하대인 9세기에 조성된 석조여래좌상(보물)이 안치돼 있으며,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절 마당에 있어 신라 하대에 창건됐음을 뒷받침한다.

세월이 흘러 건물이 낡아 허물어지자, 1856년(철종 7) 3월에 성암(星巖) 스님이 약사전을 중수했으며, 1905년 9월에 화주승(化主僧, 불사를 책임졌던 스님) 선주(善周)가 관찰사 주석면(朱錫冕) 등 관부(官府)의 도움과 권선을 맡았던 김기창, 김은수, 박태환, 신명균, 최상석의 시주로 약사암을 중건했다.

조선 말기의 지리지 지도에 “약사(藥寺)”로 적혀 있어 속칭 ‘약사절’로 불린 연유를 짐작할 만하다. 약사사는 계곡과 새인봉이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다워 찾는 사람이 많다. 1978년 이후 약사사 중건 불사가 이뤄져 지금은 아담한 수선(修禪) 장소로 알맞은 곳이 됐다. 특히 달 밝은 밤에 요사채 방에 앉아 새인봉 위에 뜬 노란 둥그런 달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잡사를 잊고 미묘한 부처님 법문을 듣고 있는 것 같아, 성속(聖俗)이 둘이 아니고 인천(人天)이 따로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으리라. 

약사사는 남향의 절집이지만 절 앞에 있는 새인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에 근래 일주문을 지었기 때문에 일주문은 북향이다. 1980년에 지은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데, 그 안에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한 석조여래좌상을 본존으로 모시고, 후불탱화는 목각으로 건물 중건 후 새로 조성해 봉안했다. 

약사사 석조여래좌상(보물).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됐으며, 무등산 자락에 몇 안 되는 석불이다. 
약사사 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 조성됐으며, 마모가 많이 진행됐다.

석조여래좌상(보물)은 대웅전 안에 모셔진 불상으로 전체적으로 석굴암의 본존불과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가는 허리와 경직된 어깨 등 어색한 점도 있어 신라 하대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한다. 1856년 「약사전중수기」에 의하면 이 불상을 약사여래로 부르고 있었다. 삼층석탑은 원래 무너진 채로 방치돼 있던 탑재들을 모으고, 잃어버린 것을 보완해 대웅전 앞마당에 복원했다. 갑석과 옥개석의 형태로 보아 신라 하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원효 스님이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무등산 불교의 역사를 알려준다.

원효사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원효(617~686)가 머물렀다는 광주 무등산 원효사에서 1980년 대웅전을 신축하던 중 유물이 출토됐다. 수백 점이 발굴됐으나 그 중 금동·청동 불상 12점, 소조 불상 18점, 청동거울 2점이 문화재로 지정됐다. 그 가운데 8~9세기의 해무리굽 청자 조각이 발견돼, 원효사의 창건연대를 높이는 단서가 됐으며,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파편들도 다수 발견돼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금동·청동 불상들은 대부분 부식이 심해 다른 불상이 가지고 있는 광배와 받침인 좌대를 잃어버렸다. 불상들은 10cm 내외의 서 있는 것으로,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까지 만들어졌다. 보살상과 동자 2점을 제외한 모든 불상이 손바닥을 앞으로 하고 불상의 오른쪽 손가락을 위로, 왼쪽은 아래로 향하고 있다.

원효사 출토 불보살상, 송광사성보박물관 소장, 사진 원효사 제공

원효사의 출토유물 대부분이 진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 불상들로 100여 점이 넘는다. 그 가운데 비교적 원래 모습에 가까운 18점이 문화재로 지정됐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머리 모양 수법이 비슷하다. 발굴 당시의 조각들을 모아 복원한 결과 머리 높이 10.5cm, 상체 10cm, 하체 6.5cm로 전체 높이 27cm가량의 불상들로 밝혀졌다. 이들 소조불의 발견으로 원래 원효사에 천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발견된 청동거울 중 2마리 용이 새겨진 거울은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하다. 중심에는 2겹으로 된 연꽃을 새겼고, 그 밖으로 2마리의 용을, 외곽에는 구름무늬를 새겼다. 가운데 있는 2마리 용은 서로 반대 방향에서 꿈틀거리는 모습이며, 예리한 발톱을 가지고 있고 여의주로 보이는 2개의 구슬이 돋아나게 새겼다. 또 다른 백색의 거울은 무늬가 없으며 별 특징이 없다. 이 2점의 거울은 고려 시대 공예 조각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원효사 동부도. 각 면에 사자와 용 등 동물을 새겨 조각했다. 

원효사 대웅전에서 왼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숲속에 원효사 동부도가 자리하고 있는데, 원효사에 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중요한 불교문화재 가운데 하나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을 마련한 후,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바닥돌과 기단 일부를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아래 받침돌 윗면에 연꽃 조각을 두르고, 옆면의 네 모서리에 수사자와 암사자를 교대로 배치했다. 가운데 받침돌은 4면에 연꽃을 새기고, 네 모서리마다 사자와 용을 각각 암수로 나눠 조각했으며, 위 받침돌은 옆면에 연꽃을 돌려 새겼는데 너무 얕아서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탑신의 몸돌은 너비보다 높이가 길며 약한 배흘림을 하고 있다. 지나치게 큰 지붕돌은 가득 새겨진 조각들로 인해 더욱 무거워 보인다. 윗면에는 기왓골과 여덟 모서리 선이 뚜렷하고, 밑면에는 2중의 서까래를 조각해 겹처마를 표현하고 있으며, 여덟 귀퉁이에는 꽃 조각 대신에 용, 다람쥐, 비둘기, 거북 등의 동물 조각을 장식했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특이한 양식이다. 통일신라의 8각 양식을 따르면서도, 받침 부분 일부에서 4각을 보이고, 지붕돌의 동물 조각 등이 전형에서 벗어나 있어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한다.

 

규봉암은 신라시대 의상 스님의 창건 설화가 전해지며, 고려시대 보조지눌 스님이 수행한 곳이다. “규봉암을 보지 않고 무등산에 올랐다고 말하지 말라”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등산 사찰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규봉암

규봉암은 고려 중기 불교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보조국사 지눌(1158~1210)과 연고된 유서 깊은 사찰인데, 조계총림 송광사의 말사로서 목우가풍(牧牛家風)을 잇고 있는 사찰이다. 

광주 지역사회에 불교가 수용된 때는 백제 말기 무진주 시기였으며, 통일신라 무주도독성 중심부 평지에 교종 사찰이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9세기 중반에 황학난야에는 체징 선사가 머물렀으며, 성거사, 백천사, 대황사 등이 중심사찰이 되어 불교계를 이끌어 간 것으로 여겨진다. 

이즈음에 이르러 무등산에도 약사사, 증심사, 원효사 등 선종(禪宗) 사찰이 건립돼 불교문화가 무등산에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무등산을 근본도량으로 삼아 차별이 없는 무등세계, 자비를 바탕으로 한 지혜로운 광명세계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됐다. 

무등산 석불암 마애여래좌상. 석불암은 장불재에서 규봉암 가는 길 지공너덜 근처에 있다

 

사진. 유동영

 

이계표
전남대와 조선대 사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전문위원을 거쳐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호남불교연구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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