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무등(1,187m)을 넘은 일출은 온종일 빛고을 너른 들을 비추이고 황혼이 되어서는 서녘 하늘, 어등(338m) 너머로 사라진다. 두 산의 품에 의향(義鄕)이며, 예향(藝鄕)이며, 미향(味鄕)이라 불리는 5월의 도시, ‘영원한 청춘의 도시’ 광주가 깃들어있다.
이 땅은 아득한 옛날, 저 무등의 높은 봉우리로부터 어등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바위 하나, 물길 하나, 이 마을과 저 동네, 비산비야의 구릉에도 어느 한구석, 찬란한 불교문화가 꽃피지 않은 곳이 없었던, 일찍이 ‘서방정토’라 불리던 땅이었다.
무등(無等)의 산세는 떡 벌어진 어깨 같고 머슴의 펑퍼짐한 등짝 같다. 뾰족뾰족하거나 오밀조밀하지 않고 말 그대로 ‘등(等)’이 없다. 무등은 무돌·무진·서석 등 옛 이름에서 유래를 찾기도 하지만 대개 『천수경』의 ‘정획무등등(定獲無等等)’, 『반야심경』의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에서 온 것으로 본다. 지극히 높은 것은 비할 데가 없으니, 등급도 구별도 차이도 없는 그저 무등이다. 그래서 무등은 ‘붓다’와 같은 말이다.
한 물줄기가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흘러 가막골에서 내려온 또 한 줄기와 만나 강을 이루고, 광주를 사선으로 그으며 내려가니, 극락강(極樂江)이다. 강은 20리를 흐르다 황룡강과 합류하고, 극락교 아래에서 영산강으로 이름을 바꿔 나주평야를 적신다. 그 무등산과 극락강 사이에 지금은 서방시장이 남아 옛 흔적을 전하는 ‘서방(西方面)’이 있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는 짧은 발걸음 속에, 여기 사는 사람들이 이 땅을 서방정토로 여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온다.
북으로 연제동이 있다. 물 귀한 마을에 탁발 나온 스님이 샘터를 꼽아주니, 거기서 물이 펑펑 쏟아져 연꽃제방을 이루었다는 연제동(蓮堤洞). 서편에는 발산마을, 밤마다 별이 총총해 별마루라 불리던 마을, 부처님 공양 바리때처럼 생겼다 해서 발산(鉢山)마을이다. 그리고 염주동, 짚봉산에서 내려다보면 염불할 때 하나둘 헤아리는 염주처럼 마을들이 늘어서 있다 해서 염주동(念珠洞)이다.
짚봉산 아래는 염주사라는 절이 있었고 목탁등(木鐸燈), 대촉등(大燭燈) 같은 옛 고갯마루 이름이 남아 있다. 극락강을 따라 내려가면 여덟 봉우리가 비상하는 학 여덟 마리 같다는 팔학산(八鶴山), 서창들녘 아래 바위가 부처님 형상이라 해서 불리는 불암(佛巖)마을이 있다.
그리고 절골마을, 죽음을 무릅쓰고 ‘단경왕후 복위소’를 올려 조광조가 “강상(綱常)의 도를 바로 세웠다”고 찬한 조선 중기 학자 눌재 박상(朴祥), 의향 광주를 얘기할 때 맨 앞에 등장하는 그의 탯자리다. 오랫동안 절이 있던 자리여서 옛 이름은 사동(寺洞)마을, 지금은 절골마을이라 불린다.
남쪽에 금당산이 있다. 무등산과 월출산을 조망할 수 있는 명당이다. 지리산 북사면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금대암처럼, 금대(金臺)가 부처님 자리이듯 금당(金堂)은 본존불을 모시는 집이다. 극락강과 광주천이 만나는 곳에 마륵동, 운천사가 있다. 거기 백호(白毫) 자국이 선명한 돌부처가 앉아 계시니, 운천사 마애여래좌상(고려)이다. 강 너머 서쪽 끝에도 용진산 마애여래좌상(조선)이 소박한 민초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또 오층석탑이 유명하다. 지산동 법원 아랫길(연화사 옆)에 지산동 오층석탑(보물, 동오층석탑)이 있고 광주공원 내에 (전)성거사지 오층석탑(보물, 서오층석탑), 북쪽 국립광주박물관에 장운동 오층석탑, 서편 광산구에 신룡동 오층석탑이 서 있다.
인도 사람들은 동쪽을 바라보고 앞을 과거, 뒤를 미래로 여긴다고 한다. 동은 지나온 세월, 서는 가야 할 시간이다. 무등산 서편 너른 들에 돌부처가 앉아 있고, 오층석탑들이 서 있고, 금당산과 연꽃마을·바리때마을·염주마을·불암마을·절골마을, 그 사이로 극락강이 흐르는 땅, 아미타불이 주석한 이 땅을 빛고을 사람들은 정녕 불국정토, 서방정토로 여겼음이라.
무돌길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하듯 무등산 자락을 넓게 도는 길이 ‘무돌길’이다. 지리산은 산역이 넓어 한 바퀴가 8백 리지만 무돌길은 51.8km, 130리 길이다. 4개 구간, 15개의 길로 나뉜다. 광주 북구(북서)를 출발해 시계방향으로 담양(북동)~화순(남동)을 지나 광주 동구(남서)로 들어온다. 산마을 사람들이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던 길, 장에 팔 것들을 이고 지고 걸어 재를 넘던 들길, 산길이다.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가 1910년 옛 지도를 토대로 길을 뚫고 이어, 2011년 완성하기까지 20여 년 공력을 쏟아 조성한 길이다.
광주북구 구간
제1길은 싸릿길이다. 싸리를 꺾어 빗자루나 삼태기 바구니 같은 것들을 만들어 고개 넘어 팔러 다니던 길이다. 2길은 조릿대길, 3길은 덕령숲길이다. 덕령은 충장공 김덕령, 애통한 그의 생을 못 잊어 광주 사람들은 그를 숭모한다. 임란 의병장으로 왜적을 물리쳤던 덕령은, 그러나 모반의 무고를 받아 혹독한 고문 속에 옥사한다. 향년 28세. 동생 덕보가 수레에 주검을 싣고 열흘을 걸어 내려와 묻은 곳이 이 산자락이다. 인근 풍암정이 덕보가 세상을 버리고 은둔했던 누정이다.
4길은 금곡숲길(원효계곡길), 담양으로 이어진다. 금곡마을에서 광주호변을 걸으면 개선사지 석등(보물)이 나온다. 석등에 새긴 「개선사석등기」에 따르면 868년 경문왕과 문의황후, 그리고 큰 공주가 발원해서 이 석등이 건립됐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공주는 훗날의 진성여왕이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6.4m)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이 개선사지 석등도 3.5m에 달해 이곳에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대가람이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이 길은 16세기 조선의 누정과 정원, 가사문학을 꽃피운 환벽당~취가정~식영정~서하당 등으로 이어진 ‘가사문학면(面)’이니 두루 둘러볼 만하다.
전남 담양구간
5길은 독수정길, 서봉사지(瑞峰寺址)가 있다. 고려 때 창건됐다가 조선 후기 폐사된 절집. 석탑(고려)과 부도(조선)가 나와 전남대 교정에 복원돼 있다. 6길은 백남정재길, 무돌길 중에 가장 힘든 고개로 호남정맥 갈림길이 교차한다.
전남 화순구간
7길은 화순 이서길, 8길은 영평길이다. 이 길에서 산을 타면 규봉암으로 오른다. 다가가면 멀리 광석대 아래 암자의 지붕이 보인다.
9길은 안심길. 옛날 안심사 터에 안심마을이 있다. 마을 뒤로 안양산이 있고, 산은 장불재로 연결된다. 안양(安養)도 안양정토에서 온 말이다. 10길
수만리길, 11길 화순산림길에서 광주로 이어진다.
광주 동구구간
12길은 만연길, 화순 구간이 끝나는 만연재부터 용연마을 정자까지 가는 길이다. 13길은 용추길, 멀리 백마능선 위로 장불재 입석대 서석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오르면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이고 중머리재로 접어들어 용추계곡으로 빠지기도 한다. 용추계곡의 샘골이 광주천의 시원이다.
14길은 광주천 생태길, 5·18 때 양민들이 공수부대에 의해 무참히 학살돼 생매장당한 주남마을이 있는 곳이다. 15길은 폐선푸른길, 철도 이설로 기능이 사라진 철길을 따라 무등을 바라보며 도심을 지나는 길이다.
주마간산하듯 무돌길을 한 바퀴 돌았다. 안 쉬고 걸으면 24시간 거리를, 사람들은 쉬엄쉬엄 서너 차례 나눠 걷는다. 130리, 32개 마을을 지나며 무등에 깃든 옛이야기를 마음에 간직하고, 이제 산으로 오른다.
팔람구암자 주상절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에서 몸을 일으킨 백두대간은 이 땅을 크게 동서로 나누는 기둥 산줄기이다. … 남하하는 백두대간은 남녘땅에 이르러 낙동정맥을 내려준 후 한남정맥 가지를 치고 … 영산 지리산을 빚고 … 호남정맥 무등산을 이루며 … 마침내 용솟음치기 시작한다. 북봉-천지인삼봉(무등산 정상)-장불재-백마능선-안양산으로 이어지는 ….”
- 조석필, 『산경표를 위하여』 중에서
호남정맥은 세 번 솟는다. 시작인 장안산, 끝인 백운산, 그리고 한복판 무등산에서 1,000m가 넘는 용솟음을 한다. 호남정맥 구간 중에 광주·전남의 진산(鎭山) 무등산이 가장 높이 솟아 있다.
무등산에 ‘팔람구암자(八藍九庵子)’가 있었다는 구전이 내려온다. 이 말을 뒷받침하듯 산자락 곳곳에 옛 가람의 흔적과 와편들이 발견되고, 석탑, 불상, 석등, 빗돌, 부도 등도 많이 남아 있다. 무등산의 사암(寺庵)은 원효계곡을 오른 의상봉 건너에 원효사, 반대편 산등성이 볕 잘 드는 곳에 증심사, 그 위에 약사사, 장불재 너머 기암절벽을 자랑하는 규봉암이 대표적이고, 석불암과 관음암, 그리고 산 아래 문빈정사 등이 있다.
광주 사람 십중팔구는 증심사 계곡을 따라 산에 오른다. 거기서 중머리 같은 민둥의 봉우리, 중머리재를 지나 동으로 오르면 장불재다. 이 고개는 화순에서 일 보러 광주를 넘나들던 사람들이 쉬어가던 툭 트인 개활지다. 여기 장불사가 있었다고 한다. 장불(長佛)은 긴 부처, 와불(臥佛)이다. 재에서 바라보는 산의 정상이 꼭 누워계시는 부처의 모습이다. 입석·서석대가 불두가 되고, 정상의 인왕·지왕·천왕 세 흙봉우리가 와불의 몸이다.
재에서 조금 오르면 입석대(立石臺)가 있다. 여기서부터 무등산의 백미, 주상절리의 비경이 펼쳐진다. 석축 단에 올라서면 돌기둥들이 줄줄이 반달 모양으로 둘러서 있다. 기둥들은 대개 10m를 넘고 큰 것은 17m에 이른다. 한 덩어리로, 여러 단으로 겹쳐 세워져 마치 석수가 먹줄을 튕겨 깎아 세운 듯 줄지어 늘어서 있다. 조선 중기까지 입석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초산고원을 헤치고 조금 더 오르면 거대한 병풍을 둘러놓은 것 같은 장엄한 돌무더기가 펼쳐진다. 유명한 서석대(瑞石臺) 수정병풍이다. 대는 동서로 늘어서 황혼에 빛을 받으면 그 빛을 반사하면서, 수정처럼 반짝거린다. 그래서 ‘서석의 수정병풍’이라 했다. 봄에 활짝 핀 철쭉이 기암절벽과 어우러질 때 장관을 이룬다. 최남선은 “좋게 말하면 수정병풍을 둘러쳤다 하겠고 박절하게 말하면 해금강 한 귀퉁이를 떠왔다고 하고 싶은 것이 서석”이라 했다.
장불재에서 동으로 2km쯤 돌아가면 지공너덜 지나 규봉암(圭峰庵)에 이른다. 입구에 돌기둥 3개가 솟아 있다. 여래존석·관음존석·미륵존석, 삼존석이라 불리는 규봉이다. 도선국사가 이름 지었다 한다. 왼편에 넓은 반석이 있다. 입석·서석과 더불어 무등의 삼석대인 광석대(廣石臺)다.
암자 뒤로 수많은 돌기둥이 옥을 깎아 세운 듯 창공에 솟아 있다. 돌기둥 숲은 사이사이 소나무와 잡목들과 어울려 천하절경을 이룬다. 이 대 10개에 ‘송하·광석·풍혈·장추·청학·송광·능엄·법화·설법·은신’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규봉 십대(十臺)’다. 풍혈대는 암자 뒤 절벽 사이의 바위굴이다. 한 생에 세 번 그 구멍을 지나지 않으면 극락에 못 간다는 전설이 있다. 설법대는 제자를 모아놓고 설법하는 모양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은신대는 도선국사가 그 위에서 송광산(조계산) 산세를 살펴 송광사를 창건했다는 『광주읍지』의 기록이 있다.
노산 이은상은 “규봉 높은 절에 종소리 끊어지고/ 밤 예불 마디마디 달은 점점 밝아오네/ 삼존석 십대를 돌아 밤새도록 헤맬거나”라고 노래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고 했던 정혜결사의 보조 지눌, ‘즉심즉불(卽心卽佛) 비심비불(非心非佛)’의 혜심 진각, 마조 도일 문하로 남종선의 맥을 이은 철감 도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라고 했던 나옹선사, 쟁쟁한 신라 고려의 고승들이 여기서 정진 수도했다는 아스라한 옛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이다.
무등산권 주상절리대는 2018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됐다. 펄펄 끓는 용암이 땅 위로 분출되면서 그대로 얼어붙은 거대한 돌기둥이 주상(柱狀)이고, 돌 틈에 스며든 눈비가 얼면서 여러 단면으로 쪼개진 것이 절리(節理)다. 빙하기로부터 억겁의 풍상을 겪는 동안 쪼개지고 깎이고 허물어지고 포개진 돌들이 오늘의 장엄한 모습을 이루었다.
여태 창공에 서 있는 것이 주상절리이고, 무너져 내린 것들이 너덜이다. 너덜은 돌의 밭이고 돌의 강이며 주상절리의 무덤이다. 무등산에는 지공너덜, 덕산너덜 등 4개의 큰 너덜이 있다. 규봉 아래 지공너덜은 폭 2km, 길이 4km 규모로 산마루에서 골짜기까지 뻗어있다.
인도 지공대사(?~1363)가 이곳에 석실을 만들고 법력으로 수억만 개의 돌을 깔았다는 전설이 있다. 지공의 제자 나옹이 여기서 정진하면서 내려온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지공너덜에는 너른 바위가 저절로 지붕을 이룬 방 하나 크기의 석실이 있는데 지눌 스님이 정진했다는 보조석굴이다. 명저 『무등산』을 남긴 박선홍 선생은 이 너덜에 대해 “괴연하던 암석으로 벽도 만들고 기둥도 만들고 남은 까긔밥”(최남선)이라는 구절을 전하면서, 어느 석공이 이 비경을 다 다듬어 깎고 남은 돌무더기의 너덜을 ‘까긔밥(대패밥)’이라 한 것은 대단한 표현이라고 했다.
산정에는 3개의 봉우리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이 무등등(無等等)하게 서 있다. 정상에 서면 서남쪽 멀리 나주평야 넘어 월출산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영산강이 빨아 널어놓은 무명베처럼 펼쳐져 있다. 맑은 날은 다도해까지 보인다. 천왕봉은 천왕봉으로, 지왕봉은 비로봉으로, 인왕봉은 반야봉으로 불리는, 와불 같은 무등산. 여기서 저 서쪽 끝, 해가 지는 어등산까지 너른 들을 서방정토로 여겼던 사람들이 사는 땅, 불교의 성산(聖山) 무등산이 어머니처럼 빛고을을 품고 서 있다.
사진. 유동영
이광이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대흥사에 자주 다녔다.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 도법 스님 밑에서 ‘자성쇄신결사’ 일을 도왔다. 법명은 효천(曉天). 글 쓰는 일을 주로 한다. 피아노에 관한 동화책과 도법 스님·윤구병 선생과 ‘법성게’를 공부한 책 『스님과 철학자』, 남도의 다락집 기행 『절절시시』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