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能所가 무너진 중도의 자리,
백척간두에서 사바세계를 바라보다
- 은암 고우隱庵古愚
‘중도의 연기’
부처님오신날에도 등을 켜지 않고, 법당에서는 재(齋)와 불공 없이 오직 법문과 참선 수련만 하는 절이 있다. 경북 봉화 문수산에 있는 금봉암이다. 기복보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청복(淸福)을 닦자는 고우 스님(隱庵古愚, 1937~2021)의 수행가풍이다. 고우 스님은 소박하고 지성을 갖춘 이 시대의 마지막 선승이었다. 학식이 뛰어나진 않으나 체득한 혜안으로 막힘이 없이 불법의 근본 자리를 현대인들에게 쉽게 설했다. 회통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주신 분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인간형은 자유인이다. 달리 말하면,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 그런데 고우 스님은 “설사 깨닫지 못한다 해도 이치를 아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치란 ‘존재의 원리’로, 본질을 볼 수 있는 시선이다. 스님은 그것을 ‘중도의 연기’로 칭했다.
고우 스님의 가르침은 ‘중도, 연기, 정견’ 세 단어로 압축된다. 스님은 “중도(中道)란 불교의 근본 자리다. 정견(正見)은 중도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연기를 바로 보는 것으로, 일상에서 시각을 변화시켜 중생의 자리에서 본래 부처임을 보게 한다”고 설했다.
깨달음은 본질을 보는 것이다. 차별 현상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그것을 아우른 공통된 본질이 있다. 스님은 중도가 바로 존재의 본질이라고 했다. 중도의 자리를 보기 위해서는 연기법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끼(짚으로 꼬아 만든 줄), 짚신(짚으로 삼아 만든 신), 가마니(짚을 돗자리 치듯이 쳐서 만든 것)’를 예시로 든 스님은 “이것들은 그 형태와 쓰임새가 모두 다르나 재료는 짚으로, 그 본질은 하나다. 이를 알아채는 게 바로 불교의 공부이자 견성”이라 했다. 스님은 중도가 곧 연기라 한다. “중생들은 차별 경계에 집착하여 분별하지만, 여래는 양변을 여읜 중도의 자리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하여 생겨나는 연기 원리를 설한다. 연기법은 곧 존재의 원리이며, 이 세상은 연기로 존재한다는 것이 불교의 답이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고우 스님의 이러한 견처에 정점을 찍은 계기는 『육조단경』의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문구였다(1987년 봉화 각화사 동암에서). 그동안 나름대로의 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했던 스님은, 이 문구에서 의혹이 들어 다시 참구하게 됐다.
이 도리에 대한 가장 명확한 설명이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에 있었는데, 다른 논서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깊은 혜안이 담겨 있었다. 스님은 “백척간두진일보란 말을 온전히 이해하고 안목이 열렸다고나 할까요. 모든 존재 원리가 이해되었습니다. 이건 화두 타파하고는 다른 건데, 당시에는 ‘회광반조’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고 술회했다.
여기서 스님은 성철 스님의 푸른 눈과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재발견하게 됐다.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수행론을 체계적인 공부 방법이라 여기고 있었던 당시의 스님은 이때부터 기존의 견해를 허물고,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를 적극 수용하게 됐다. “우리가 본래 부처인데, 착각으로 중생이라 한다. 그 착각 망상을 완전히 없애 본래 부처로 돌아가려면 일체 번뇌망상을 완전히 타파하는 확철대오(廓徹大悟)의 순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돈오돈수로 깨달음의 기준이다.” 고우 스님은 중생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이 바로 돈오돈수의 순간이라고 한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라’는 의미에 대한 고우 스님의 법문이다. “백척간두란, 능소(能所, 주체와 객체)가 무너진 중도의 자리를 말한다. 그러니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내디딤은 떨어져 죽는 게 아니다. 중도의 견처에서 자유자재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이 바로 ‘진일보’함이다. 백척(중국 도량법 기준으로 약 33m)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에 몇몇 불상들이 이 높이로 세워졌다. 주객의 대립이 사라진 중도의 견처가 바로 여래의 견처임을 알아야 한다. 중도의 원리를 알 때 누구든지 자유인이 될 수 있다.”(제7회 금봉암 참선법회 <육조단경>, 유튜브에서)
스님은 중도를 이해하는 것은 개인과 사회 구성원 모두 존중하면서 함께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길이라고 하며, 두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하나는, 영주 시내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보살님의 경우였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던 보살님이었는데, 찾는 손님이 없어 기본 운영비마저 적자를 내고 있었다. 너무 답답한 심경에 고우 스님께 하소연을 했다.
“스님, 손님들이 없어 장사가 너무 안 됩니다. 가게를 접어야 할지 고민입니다.”
“보살님은 손님이 오면 어떤 마음으로 대하십니까?”
“우리 식당에 와서 밥 먹고 거기에 상응하는 밥값을 내는 사람이지요.”
“보살님, 내일부터는 식당에 찾아오는 손님을 돈으로 보지 말고 은인으로 생각하고 대하십시오. 그 손님들이 주는 돈으로 보살님 아이들 대학 보내고, 그 손님들 덕분에 보살님이 먹고살 수 있으니, 보살님 가족을 살려주는 은인입니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손님이 오시면 우리 가족을 살려주시는 은인에게 은혜를 갚는다 생각하며 대접하십시오.”
“아, 스님. 그 부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일부터 그리하겠습니다.”
“보살님, 이기심으로 장사를 하면 손님이 돈으로 보일 뿐입니다. 중도의 연기법에서 장사를 하면 손님이 내 생활에 보탬을 주는 ‘은인’으로 보입니다.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왔는데 얼마나 잘 해주겠습니까. 당연히 손님들도 흡족해서 다시 찾게 되겠지요.”
일 년 후 그 식당은 열 명의 직원이 일할 정도로 많은 손님이 찾는 음식점이 됐다. 다른 하나는, 금봉암에 와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던 기업인의 일화다. 선총이라는 모임의 회원들이 금봉암에서 3박 4일의 일정으로 수련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때 스님은 영주 식당의 보살님을 예로 들면서 이 세상은 서로서로 도움을 주는 관례로 서로에게 은인임을 강조하는 법문을 했다. 더하여 “노사분규의 과정에서는 노조와 사측이 서로가 은인이라고 생각하면 갈등이 해소된다. 회사(사장) 측은 노동자에게 ‘아, 저분들이 회사에 돈을 벌어주고, 그 덕택에 우리가 편하게 일하며 더 좋은 처우를 받으니, 저분들 덕을 본다’고 감사해야 한다. 반면에 노동자는 회사 측에 ‘일자리를 만들어 우리에게 월급을 주니 고맙다’고 여기면 된다. 서로서로가 은인이다.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성립될 수 없는 관계라 서로에게 양보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침 이 법회에는 노사분규로 인해 복잡한 머리를 식히러 절(법회)로 피신해 온 소규모 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이 참석하고 있었다. 스님의 법문에 감명받은 사장은 즉시 마당으로 나가 전화를 걸어 노조 측에서 제시한 20%의 인상보다 5%를 더하여 25%를 올려주겠다고 통보했다. 대치 상태에 있던 노조 측도 사장의 이런 태도에 놀라 고마운 마음으로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업무에 임했다고 한다. 결국 사장의 한 생각 돌림이 직원들의 마음마저 바뀌게 한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사회의 갈등과 분규가 생기더라도 곧 해소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스님은 생활을 떠난 불교는 있을 수 없기에 “불교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은 불교를 믿지 않고 수행하지 않는 사람과 분명히 차별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곧 불교의 마음과 생활의 마음이 따로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굳이 수행을 해서 깨닫지 못하더라도 불교를 이해만 하게 되더라도 생활의 질이 달라진다”고 했다. 스님은 “불교는 이해가 있고 깨달음이 있는데, 깨달음은 굉장히 어렵다. 그러나 이해를 바탕으로 깨달음에 간다면 그에 상응하는 단계만큼 생활에 변화가 온다. 그러니 이해를 바탕으로 깨달음에 가는 길이 좋은 듯하다. 궁극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마음과 바뀌는 마음과 생활하는 마음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각만 바꿔 어떤 고정관념과 주관과 객관을 깨뜨린다면(중도의 자리를 이해한다면) 따로 수행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불교는 업도 없고 죄도 없습니다”
고우 스님은 단순한 인과법문을 거부한다. “그것은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일로, 마치 독풀을 돌로 누르고 있는 것과 같아서 뿌리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아집을 키우는 것”이라 했다. 이것은 25세(기존의 자료에는 26세로 나오는데 고우 스님이 직접 영남대 이강옥 교수에게 25세라 밝힘)에 폐병이 들어 요양하러 절로 왔다가 출가하게 된 스님의 체험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되도록 깊은 산속의 절을 찾다 보니 청암사 위 수도암으로 왔는데, 머무는 동안 불교를 처음 접하고는 너무 재밌어 폐결핵 약을 버렸어요. 그런데도 병이 저절로 나았습니다.” 여기서 스님은 ‘죄와 마음이 멸해 모두 공함(罪忘心滅兩俱空)’ 즉, 일체가 다 공함을 체득한 것이다. 그래서 전생의 업에 대한 질문에 “업은 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죄의식이지요. 본질을 이해하는 순간 업은 없어지고 모든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죠. 업은 실재가 아니라 허구이자 착각의 세계입니다. 다른 종교는 원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불교는 업도 없고 죄도 없는 것입니다”로 답했다.
선승인 스님이었지만 참선 우월주의는 경계했다. 참선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이미 참선의 길에서 벗어난 경우로 보았다. 참선 우월증에 걸리면 교만심이 생기기 때문에 망상에 빠진 상태다. 그러니 이미 참선이 아니기에 절대로 참선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진정한 참선이란 “생활 속에서 이기적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라고 스님은 가르쳤다.
부처님이 오신 이 땅에서, 우리 모두 백척간두(중도 마음자리)에 올라 고우 스님의 가르침대로 진정한 참선의 길을 걸었으면 한다.
효신 스님
철학과 국어학,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