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를 다듬고 자르는 ‘울내미’ 이발사, 구산수련九山秀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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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다듬고 자르는 ‘울내미’ 이발사, 구산수련九山秀蓮
  • 효신 스님
  • 승인 2023.03.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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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스님들의 수행과 사상]
자수로 놓은 구산 스님 사진. 송광사 성보박물관 소장

“일 수좌, 구정(九鼎) 선사”

송광사 하면 자연스레 뒤따르는 단어는 여름수련회였던 적이 있다. 여기에 ‘사자루 아래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첨가하면 수련회에 다녀온 사람들로 인정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받았다. 송광사 여름수련회는 대입시를 방불케 할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합격 통보를 받기 위해서는 왜 참석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연과 얼마나 깊은 불심을 지녔는지를 읍소해야만 했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을 재수한 끝에 겨우 참가할 수 있었다. 반세기를 지난 지금도 1971년에 시작한 송광사 여름수련대회가 여전히 열리고 있으니, 이것은 재가자 교육을 위해 수련회를 시작한 구산수련(九山秀蓮, 1910~1983) 스님의 법력이자 원력으로 볼 수 있다.

스님은 은사인 효봉 스님의 유훈을 받들어 송광사에 조계총림을 이루어 보조지눌 스님의 맥을 잇는 목우자 선풍을 자리 잡게 했고, 나아가 불법이 미약한 전라도의 절들을 재정비해 다시 옛 광명을 되찾게 만들었다. 스님의 정진력은 지역적 편견으로 서로 다툼이 생기는 선방에서도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할 만큼 치열했다. 효봉 스님은 누가 전라도 사람을 통칭해 욕하면 “우리 구산이 봐라. 전라도 사람 욕하지 마라, 이렇게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사람 봤는가?”라며 그들을 침묵하게 했다고 한다. 구산 스님은 시대의 편견과 개인적 편견에 오직 수행을 통한 당신의 법력으로 주위를 감화시켰다. 구산 스님은 “중은 본분인 ‘마음 닦는 일’에 전념하고, 절에 있을 때나 절 밖에 있을 때나 중의 본분을 잊지 않아야 한다”며 본분사 도리를 평생토록 강조하며 엄격하게 스스로를 경책했다. 증손상좌 오경 스님의 회고(『깨어남의 시간들』, 이강옥 저, 돌베개[2019])는 처절한 구산 선사의 수행관이 압축돼 있다.

“우리 구산 스님 별명이 울내미야, 울내미(‘울보’의 경상도 말, 전라도 말로는 ‘움보’). 법문하면서 맨날 울어.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세상을 모르는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남에게 하고, 이게 옳니 그러니 하고 있는가, 내가 진리를 모르는데, 그런 내가 남에게 이거야 저거야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할 수 있느냐’라며 너무 사무치게 말씀하며 우시지. 사람들은 구산 스님이 도인이니 아니니, 똑같은 법문을 하니, 견처(見處)가 있니 없니 하지만 내게는 언제나 같은 이야기지만 들을 때마다 다른 이야기로 들리는 거야, 들을 때마다 정말 감동하게 되는 거지, 일흔다섯 살 노인네가 처음 출가한 스무 살 청년의 그 절절한 진리에 대한 열정을 오롯이 간직하고 계신 거야. 내가 50년 뒤에도 저런 순수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을까. 언제나 나에게 물어야 했지.” 

구산 스님의 속명은 진양 소씨 봉호[蘇䭰鎬]로, 1909년 음력 12월 17일(양력 1910년 1월 27일) 전북 남원시 내척리 509번지에서 6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갑작스러운 부친의 별세(1923년)로 소학교만 졸업한 채, 용성소학교 정문에서 ‘명치(明治)이발관’에서 이발사를 하며 집안을 도왔다. 그래서 이발사 출신이었던 부처님 십대제자에 비유해 우바리존자로도 불렸다. 이강옥 교수는 시골 이발사라는 구산 스님의 전직이 출가의 길을 다진 것으로 평했다. 스님은 아주 키가 작은 이발사였지만 키 큰 손님들은 이발 의자에 앉으면 저절로 눈높이가 같아졌기에 평생토록 상대방에 가식 없이 눈높이를 맞춰 법을 전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보았다. 이발(理髮)은 ‘머리를 다듬다’는 뜻으로, 지나치게 짧게 잘라도 안 되고 지나치게 길게 잘라도 안 되니 중도의 도리와 살활(殺活)의 원리를 이미 터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육조 혜능 스님처럼 구산 스님은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노동을 함으로써, 무식하지만 무식하지 않았고 유식하면서도 그 지식의 한계를 넘어선 무식자로 생애 이른 시기부터 이미 불법의 요체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산 스님은 칠십의 노구에도 몸소 밭일을 하여 “일 수좌, 구정(九鼎, 스승이 시키는 대로 솥을 아홉 번 걸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 선사”라 불리기도 했다. 방장인 노스님이 대중들과 똑같이 운력과 정진, 거기다가 법문 및 대중접견까지 도맡았으니 얼마나 힘이 드셨겠는가. 그러다 보니 선방에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발라당 발라당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이 모습은 젊은 수좌들에게 오히려 경책이 됐다. 치열한 수행력으로 ‘대추 방망이’로 불린 스님의 한창 시절을 그릴 수 있었다.

돌사자(石獅子)라는 별명도 갖게 됐는데, 스님이 “나는 조계산 숲속에서 채마밭이나 매다가 오가는 운수객들의 묻는 말에 응답이나 하고, 동서양 다른 나라 사람들이 찾아와 인간의 행로를 물으면 방향을 가리키며 맞고 보내는 네거리의 돌사자다”라며 스스로가 그리 칭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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