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의 근심을 풀어준 영축산 도인, 경봉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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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의 근심을 풀어준 영축산 도인, 경봉 스님
  • 효신 스님
  • 승인 2022.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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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스님 되돌아보기
‘영축산 도인’으로 불렸던 경봉 스님

통도사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어는 영축산이다. 원래 인도의 영축산은 부처님이 경을 설하셨던 곳이라 그 의미가 깊은데, 통도사의 산이 그와 닮아 영축산으로 불린다. 영축산의 가장 화려한 시기는 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 스님이 주석하면서 법문을 펼치던 때다. 살아생전 스님의 법문이 펼쳐진 1925년 극락암에서 『화엄경』을 설한 시기부터, 특히 ‘화엄산림법회’가 대대적으로 펼쳐진(큰절에서 동짓달 한 달 동안 『화엄경』 설법이 펼쳐진) 1970년부터 입적한 1980년대까지 한국불교는 영축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래서 ‘영축산 도인’이란 칭호로 압축해 경봉 스님을 불렀다.

 

인생의 4대 의혹과 한학

경봉 스님에게 『화엄경』은 수행의 요체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경이었기에 사부대중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화엄의 세계를 알리고 가르쳤다. 그의 깨침도 화엄산림법회 기간에 성취했다. 낮에는 법사로 무량수각에서 『화엄경』을 강설하고 밤에는 스님의 처소였던 삼소굴(三笑窟)에서 정진하는 도중이었다. 어느 날(1927년 11월 20일) 새벽, 방 안에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는 순간 화두를 타파했다.

스님은 활연대오(豁然大悟, 마음이 활짝 열리듯 크게 깨달음)하기까지 4가지 의혹을 품고 다녔는데, 이른바 ‘인생의 4대 의혹’이라 칭했다. 즉 ①내가 나를 모르고(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고), ②자기의 소소영령(昭昭靈靈, 한없이 밝고 신령함)한 것이 어느 곳에 있다가 부모 태중으로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③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④죽는 날이 언제인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을 찾아야만 했다. 그는 “한세상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참된 주인공을 찾을 때까지 목숨을 걸고 정진”했다. “이리하다가 죽은들 어떠하리”라는 독백이 그의 일기에 나온다. 스님의 출가 계기는 모친의 죽음이었다. 그러니 스님의 4대 의혹은 자연히 인생무상의 근원인 죽음을 뚫는 데 간절한 기제로 작용했으리라. 스님은 15세 때 겪은 모친상의 슬픔으로 1년 뒤 통도사로 출가했다. 그렇게 청년 김용국은 16세 때 ‘영축산 도인’의 첫발을 내디뎠다. 

스님은 경남 밀양 부내면(현재의 밀양 시내) 출신이다. 어릴 때 『사서삼경』과 『명심보감』 등 한학을 사사해 한문 실력이 출중했고, 이는 스님이 경을 해석하고 글을 쓰고 시를 짓고 외부 인사와 교류하는 근간이 됐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국권을 강탈한 일본에 저항한 장지연은 마산 포교당에서 경봉 스님의 법문을 듣고 교류를 하면서 여러 글에서 스님을 칭송했다. 

“단아한 성품, 계행이 철저하여 승속을 막론한 추앙의 대상, 해박한 학식, 출중한 한문 실력으로 시를 잘 짓고 글을 잘 쓰며, 포교당에서 스님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으며, 본인(장지연)도 스님의 “법석에 임하여 법문을 들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라고 밝혔다. 

26세의 젊은 선승과 55세의 지식인과의 만남이었다. 비록 나이 차가 있었지만, 스님을 향한 장지연의 존경은 극진했다. 특히 장지연의 글에서 “젊은 스님의 해박한 학식과 출중한 한문 실력”은 여러 곳에서 강조됐다. 경봉 스님의 한학과 연계된 묘한 인연은 법맥에서도 드러난다. 상좌 벽안의 출가 전 훈장 이력과 손상좌 지안의 속가 부친이 서당 훈장이었던 배경은, 세 사람 모두 어린 시절 한학을 사사한 공통의 요소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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