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농불교의 효시, 학명鶴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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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농불교의 효시, 학명鶴鳴 스님
  • 효신 스님
  • 승인 2022.07.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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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스님 되돌아보기]
선농일치를 독려한 학명 스님이 쓴 「선원곡」

“믿음은 종자요, 고행은 비(悲)이며, 지혜는 내 멍에와 호미, 부끄러움은 괭이자루이며, 의지는 잡아주는 줄, 생각은 호미 날과 작대기이다.”

부처님은 마음밭을 갈고 김매는 농사로 온갖 고뇌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수행자라 하셨다. 그래서 심전(心田), 심지(心地)는 불교경전의 대표적 비유어이다. 마음밭을 갈아 마음의 땅에 씨를 뿌려 그것을 수확하는 농부가 바로 수행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지혜와 생각으로 비유한 호미를 소재로 농선가(農禪歌)를 부르며 선농일치(禪農一致) 참여를 독려한 스님이 있다. 학명 계종(鶴鳴啓宗, 1867~1929) 스님이다. 166구 「선원곡(禪園曲)」의 한 대목인 호미 경작 노래는 다음과 같다.

호미 잡고 한 번 파니, 일생참학(一生參學)이 아닌가. 
호미 잡고 두 번 파니, 이팔청춘(二八靑春) 좋은 때다. 
호미 잡고 세 번 파니, 삼생인연(三生因緣) 반가워라. 
호미 잡고 네 번 파니, 사대색신(四大色身) 허망하다. 
다섯 번째 파고 나니, 오호연월(五瑚烟月) 행각하세. 
여섯 번째 파고 나니, 육근청정(六根淸淨) 아니 될까. 
일곱 번째 파고 나니, 칠전팔도(七顚八到) 다시 할까. 
여덟 번째 파고 나니, 팔식풍랑(八識風浪) 고요하다. 
아홉 번째 파고 나니, 구천명월(九天明月) 다시 본다. 
열 번 파고 쉬였으나, 십십무진(十十無盡) 나아가세. 
(『일광』 제2호, 77쪽)

학명 스님의 <달마도>, 혜광 스님 제공

반농반선 

한국불교의 새 물결, 반농반선半農半禪 학명 스님은 “움켜잡은 호밋자루는 나무부처님이 아닌가, 노동하는 동안 자신을 보지 못하면 그저 노동일 뿐이고 거짓 노동일 뿐”이라 했다. 스님은 수행자를 농부로 칭하며, 자호(自號)를 백농(白農)이라 했다. 대중을 이끌고 내장사 주변의 넓은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노동하고 운동하니 신체 따라 건강하다, 정중공부(靜中工夫) 그만두고 요중공부(鬧中工夫, 시끄러운 가운데서 집중력을 잃지 않는 공부)하여 보세”라며 선농불교의 문을 열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노동의 대가로 건강을 제시한 점이다. 피상적인 자급자족의 의미에 앞서 개인 존재에 대한 인식이 기반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필자와 인연이 있는 수좌(무연) 스님은 몸이 안 좋아 줄넘기를 시작했는데, 줄넘기하면서 공부가 더 잘 돼 일과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다. 무연 스님의 초점이 운동이 아닌 수행에 귀결점이 있듯, 건강한 몸으로 즐겁게 행하는 요중공부의 완성이 학명 스님의 목적이다. 달리 말하면 이 도달점은 선농일치(禪農一致)이다. 선과 농사가 둘이 아님[不二]을 실현하는 것이다. 

선학원의 선우공제회 활동으로 인연이 있던 영호(석전 박한영) 스님이 쓴 학명 스님의 「사리탑명병서」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농선(農禪)의 화두를 연[創開禪農話] 분”이라고 평했다. 그만큼 학명 스님은 논밭을 개간하는 반농반선(半農半禪)으로 한국 선문의 새 물결을 일으켰다. 이것은 선농불교의 효시가 됐고, 1923년 초부터 스님이 열반한 1929년까지 정읍 내장사에서 실행됐다.

백장청규처럼 내장사 선원도 운영 청규가 있다. 스님이 규정한 <내장선원 규칙>의 주요 내용을 요약해 보면 ‘계정혜(戒定慧) 삼학의 균형과 계절의 특성을 반영한 수행 운영의 융통성, 개혁의 물결을 이끌어갈 인재양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먼저, 선원의 목표는 반선반농으로 변경하고, 함께할 회원은 새롭게 발심한 경우나 첫 입산 출가자를 대상으로 했다. 단, 구참납자도 근성(勤性)이 있는 경우는 함께했는데 여기서 강력한 개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일과는 오전 학문, 오후 노동, 야간 좌선으로 세 분하고, 파계 및 나태 등을 엄금하여 계정혜 삼학을 반영했다.

그다음, 계절에 따른 수행 내용으로 동안거는 좌선 위주로, 하안거는 학문과 노동 위주로 했다. 안거증은 3년 후 수여했는데, 수행의 기본 기간을 3년으로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범패 및 찬불 등을 학습하고 다양한 가사를 지어 일상에 활용한 점은 매우 독창적인 면이다. 전라도 특유의 예술적 감성을 접목해 불교 수행문화로 승격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선농불교의 개혁 실행은 스님의 일생에서 늦은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그 계기는 만해(1879~1944) 스님과의 인연으로 알려져 있다. 스님이 거처하던 월명암 근처 양진암에서 만해 스님이 3일간 머문 적이 있었다. 만해 스님은 떠나면서 “이 세상 외에 천당 없고 인간에게는 지옥도 있는 것, 백척간두에 서 있는 그뿐 왜 한걸음 내딛지 않는가?”라는 게송을 학명 스님에게 전했다. 이 말을 곱씹고 곱씹은 학명 스님은 고민을 거듭 후 내장사로 내려왔다고 한다. 스님은 월명암에서 10년 동안 참선하려는 애초의 계획을 접고 하산해 조선불교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 

학명 스님이 부안 내소사에 주석하는 만허 스님에게 보낸 친필 엽서, 서울 전등사 동명 스님 제공

 

호남의 대명사 학명산천

학명산천(鶴鳴山川)이라는 말은 당시 호남을 일컫는 대명사였다고 한다. 스님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데, 스님의 불교개혁관은 원불교 창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월, 스님을 찾아온 박중빈(1891~1943)은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정서적 교감뿐만 아니라 스님의 설법에 깊이 감복해 제자의 예를 갖추었고, 이후 원불교를 창시했다. 이런 배경으로 스님은 원불교에서 오히려 더 중시되고 있다.

학명 스님의 속명은 백낙채(白樂彩)로 1867년(고종 4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방마리 방뫼마을에서 태어났다. 동학혁명의 태동기였던 피폐한 시대였다. 스님의 개인적 환경도 암울했다. 부친의 병고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16세부터 부모와 동생들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야 했던 스님의 성장기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모필 제조 기술을 익혀 붓을 팔아 생계를 해결했는데, 장사 운이 있었는지 약간의 논밭을 사는 여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스무 살 무렵에 부친이 44세로 세상을 떠나자 집안일은 동생들에게 맡기고 전국 각지를 돌며 붓을 팔러 다녔다. 전국을 유람하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부친의 죽음을 통한 무상의 도리를 마주한 데 있었다. 붓은 특정 계층에서 소비되는 품목인 만큼, 양반가 아니면 절이 주요 판매처였다. 

붓 상자를 메고 필상(筆商)으로 전국을 다니던 어느 날, 순창 구암사(龜岩寺)에 들렀다가 일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40여 명의 학인스님들이 간경(看經, 원래는 경을 보는 것을 말하는데 소리 내어 읽는 독경까지 의미 확장)하는 모습을 보고 환희심을 일으켜 출가를 발심했다. 당시 구암사 강원에는 명망 높은 강백(講伯, 경론을 가르치는 강사스님에 대한 존칭)인 설두 스님이 학인들을 지도하고 있었으니, 그 분위기가 다른 절과는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우선 고향으로 돌아와 본인을 의지하고 있는 가족들의 살림살이 등 주변을 정리한 후, 고향 인근의 불갑사로 출가했다. 발심 후 곧바로 출가하지 않고 주변 정리의 시간을 가진 것은 그의 효심 때문으로 보인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뒤, 본인의 공양을 조금씩 덜어 누룽지를 만들어 모아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속가 모친에게 드렸다는 일화에서도 효심의 깊이를 알 수 있다.

1887년 2월, 학명 스님은 불갑사의 환송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계종(啓宗)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금화 스님에게 수계를 받고 3년간 불갑사에 머물며 기본 수행을 익힌 후, 본인을 발심하게 한 구암사 강원을 찾아가 경학을 배웠는데, 그때 나이가 24세(1890년)였다. 1900년(30세)에 금화 스님에게 건당입실해 학명(鶴鳴)이라는 당호를 받고, 이후 구암사와 운문암 등에서 강회를 열어 수년간 학인을 가르쳤다. 선 수행은 1902년(32세)부터 시작했는데, 1912년 월명암에서 깨침을 얻어 오도송을 읊었다. 

학명 스님은 부안 내소사, 변산 월명암 등의 주지 소임을 지냈고, 만암 스님이 주지로 있던 백양사의 재건을 지원하기도 했다. 1914년 봄부터 중국 절강 지역의 총림과 일본 사찰을 다녀왔는데, 중국 비은(費隱) 선사와는 수시(垂示, 공안에 대한 요점을 제시한 서문) 문답을 나누었고, 일본 임제종 본산인 원각사의 관장인 샤쿠소엔(釋宗演) 선사와는 필담으로 선문답을 나눠 스님의 선풍을 알렸다. 특히 샤쿠소엔 선사와 나눈 필담은 동행한 아사히 신문기자가 일본에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정읍 내장사에 있는 학명 스님 비(碑) ⓒ불교신문
정읍 내장사에 봉안된 학명 스님 부도 ⓒ불교신문

달마도와 당부

학명 스님은 달마와 흡사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달마상을 즐겨 그렸다. 평소에는 달마가 갈대 타고 강을 건너는[절로도강(切蘆渡江)] 입상을 많이 그렸는데, 열반에 든 날은 좌상의 달마상만 6장 그렸다. 그날 아침(1929년 3월 27일), 맏상좌 고벽에게 “오늘 정읍 장날이니, 장에 가 무명베 4필, 짚신 10켤레, 그리고 상례에 필요한 물품을 알아서 사오라”고 일렀다. 그리곤 달마상을 그린 후 제자 운곡 스님과 불자들에게 『원각경』을 독송하도록 했다. 스님은 가부좌 튼 채 그 독경을 들으며 내장사에서 입적했다. 그때가 오후 2시였고, 스님의 세수는 63세, 법랍은 43세였다. 스님의 몸에서는 70개의 백색문양사리와 영골(靈骨, 손가락 사이 넓이 모양의 하얀 뼈)이 나왔다.

학명 스님은 선농불교의 효시이자 수행자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개혁가였다. “개인마다 여법히 하면 만천하 인생이 모두 승화(僧化), 사화(寺化), 법화(法化), 불화(佛化)가 될 줄로 생각한다”라는 스님은 선농일치를 몸소 실행에 옮겼다. 특히 수행자로서의 정체성을 환기해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독獨살림하는 법려法侶에게 권함」)하는 등 불교개혁을 완성하고자 했다. 또 원적가, 왕생가, 신년가, 망월가, 해탈곡, 선원곡, 참선곡 등이 많은 유고 작품을 남겼는데, <몽중유(夢中遊, 꿈속에서 노닐다)>는 연말이나 새해가 되면 달력에서 보게 되는 친숙한 시이다. 친숙한 만큼 곱씹을수록 울림 있는 학명 스님의 가르침이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마시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효신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철학과 국어학,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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