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당간 강릉 삼척] 강릉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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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당간 강릉 삼척] 강릉 이모저모
  • 계미향
  • 승인 2023.06.2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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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으로 가는 고갯길, 대관령
지금은 터널이 뚫렸지만, 예전에 강릉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대관령을 넘어야 했다. 국도를 따라 대관령 정상에 올라서면 범일 스님을 모신 ‘대관령국사성황사’와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산신당’이 나란히 있다.

‘아흔아홉구비’ 대관령

옛적에는 서울에서 강릉에 가려면 멀고도 험한 태백산맥의 주요 고개인 대관령(832m)을 통과해야 했다. 그나마 대관령이 한계령(1,004m), 두문동재(1,268m), 통리재(770m), 백복령(780m)보다 넘기 쉬웠기에 원주와 강릉을 잇는 통로로 사용됐다.

한국인 대부분은 대관령과 강릉에 얽힌 추억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산’ 하면 설악산이 연상되고, ‘바다’ 하면 대관령 너머의 강릉이 떠오를 정도이니, 강릉과 대관령이 한국인의 정서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어떤 이에게는 수학여행지로, 어떤 이에게는 신혼여행지로,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했던 추억이 곳곳에 봉인돼 있을 것이다. 

강원도는 드높은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데다 겨울이 길고 추우며 눈이 많이 내리다 보니 자연히 외부와 고립됐다. 그로 인해 너와집, 설피, 동태, 감자, 메밀전병, 올챙이국수 등 독특한 생활 풍경과 음식으로도 유명하다. 강원도는 높은 산세로 교통도 불편하고 위험한 곳이다 보니 예로부터 대관령 산신에게 비는 풍속이 있었을 만큼, 대관령은 강릉 시민 및 영동 지방 주민들의 애환이 서린 고개였다.

‘대관령’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에 처음 나타난다. 왕건이 928년에 이 고개를 넘어 김순식을 투항시키고 왕씨 성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높고 험준한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으로 불리다가, 영동 지방의 ‘큰 관문에 있는 고개’라는 의미의 대관령(大關嶺)이 됐다고 한다. 

강원도는 대관령 마루를 기준으로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로 나뉜다. 황병산·선자령·노인봉·발왕산으로 둘러싸인 대관령은 약 13km로 이어진 고위평탄면으로, ‘아흔아홉구비’라 불릴 정도로 많은 굽이가 있다. 이곳의 연평균 기온은 7℃ 안팎으로, 남한에서 가장 낮아 연중 서늘한 기후를 유지한다. 그 결과 여름철의 고랭지 채소 재배가 가능하고 소와 양의 사육을 위한 초지가 펼쳐져 있다. 산록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용평스키장이 있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주요 경기가 펼쳐지기도 했다. 대관령을 분수령으로 한 물줄기 또한 만만치 않아 동쪽으로는 오십천, 서쪽으로는 송천의 한 줄기를 이룬다. 

 

강릉의 옛 지명

강릉(江陵)은 원주(原州)와 더불어 ‘강원도(江原道)’라는 도명을 이룬다. 강릉은 동예[濊]의 소국 도읍지로, 기원전 129년에 위만조선에 속해 있었다. 313년에 고구려가 점거하고 하슬라(何瑟羅) 또는 하서량(河西良)이라 불렸다(『삼국사기』, 「지리지」). 창녕의 <진흥왕척경비>에 하서아(河西阿)라 한 것으로 보아 4세기 말에는 신라 영역으로 편입됐고, 5세기 중후반 장수왕의 삼척 공격과 함께 고구려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초 지증왕 대에는 다시 신라의 변경 하슬라주(何瑟羅州)로 등장한다. 경덕왕 대의 한화(漢化) 정책으로 지명을 명주(溟州)로 바꾸어 신라 9주 5소경 중의 하나가 됐으며,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김주원의 후손들이 이 땅을 다스렸다. 

명주라는 지명과 관련해 강릉 지역의 수호신 범일국사(梵日國師)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 권3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조에 의하면 굴산조사(崛山祖師) 범일이 당나라에 유학했을 때,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왼쪽 귀가 잘린 한 사미 스님을 만났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범일이 중국 당나라로 넘어갔을 때 명주(明州)에서 관음신앙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영향으로 신라에도 정취보살(正趣菩薩) 신앙이 전래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명주(明州)는 지금의 영파(寧波)로 738년에 월주(越州)에서 분리됐다고 한다. 명주에는 황제의 명으로 건축된 유서 깊은 사찰인 개원사(開元寺)가 있었다. 개원사는 신라, 일본 등 각국의 스님들이 모여 교류하던 곳이었다. 그곳이 『삼국유사』에서 말한 개국사와 같은 곳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강릉의 옛 지명 명주(溟州)와 당나라의 명주(明州)는 분명 한자는 다르지만 같은 음을 가지며, 범일국사의 활동지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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