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던 ‘옛날 여름’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됐다. 그런데 의외로 더위를 느낄 기회(?)는 많지 않다. 사람이 드나드는 건물 대부분은 냉방기를 가동하고, 여름 한정 ‘움직이는 에어컨’ 버스와 지하철이 있어 적어도 실내에 있거나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동안은 더위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외에서 일하는 경우는 예외다.) 그나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바깥에서 이동하는 사이사이 잠깐씩이라도 불볕더위를 겪지만, 자차로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 중에는 계절 변화를 거의 못 느낀 채 여름을 나는 이들도 많다. 겨울철 얼어 죽어도 아이스커피를 고집한다는 ‘얼죽아’족에 이은 여름철 뜨거워 죽어도 따뜻한 커피를 고집한다는 ‘뜨죽따’족의 등장은 어쩌면, 지금의 겨울과 여름은 개인의 취향과 입맛을 고집할 정도로 견딜 만큼 춥고 견딜 만큼 덥다는 이야기다.
반면 냉·난방기가 없던 옛날에는 오늘날보다 체감 기온 변화가 뚜렷했고, 몸의 반응이 지금보다 민감했다. 날씨가 더워지면 에누리 없이 정직하게, 딱 더워진 만큼의 땀을 흘렸다. 처마 밑에 앉아 맞는 살랑바람이 소중했고, 나무 그늘에 더위를 식히며 취하는 휴식이 더없이 달콤했다. 하지만 굳은 소뿔도 녹아서 꼬부라진다는 삼복더위에 몸속 깊이 자리 잡은 열 기운은 바람과 나무 그늘로도 식혀지지 않았다. 장장 석 달간 이어지는 여름을 견디기 위해서는 몸속 열을 식히는 좀 더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답은 음식 속에 있었다.
콩국수로 전수되는 조상의 지혜
과거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기성세대는 곧장 ‘꼰대’ 소리를 듣는 요즘이다. 하지만 꼰대 소리를 듣더라도 이전 세대의 지혜만큼은 다음 세대로 전수되어야 하지 않을까. 따로 더위를 극복할 방법을 찾지 않아도 ‘살만해진’ 지금, 사람들은 내 몸속 열기를 바깥으로 빼낼 음식에 무엇이 있는지, 더위 먹은 내 몸이 원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으레 여름이 되면 찬 음식을 찾고 복날이 되면 큰 고민 없이 남들 따라 삼계탕을 먹을 뿐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살인적인 더위를 이겨내야 했던 우리 조상들은 체온을 내리고 활력을 되찾아줄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했고 음식에서 답을 찾았다. 이렇게 조상의 지혜가 담긴 많은 음식이 여름을 대표하는 계절 음식으로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그래서 음식을 먹는 일은 혀를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몸을 생각하는 일이자 조상의 지혜를 음미하는 일이다. 이번에 소개할 콩국수에도 여름을 건강하게 나기 위한 조상의 지혜가 담겼다.
콩국수의 주재료인 콩은 본디 찬 성질을 갖고 있다. 콩이 든 자루에 손을 넣으면 시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찬 성질을 지닌 콩에 열을 가해 섭취하면 몸속 열이 밖으로 배출되며 체온이 내려간다. 그뿐인가. 콩은 단백질이 풍부해 더위에 지친 몸에 힘을 실어주는 식물성 보양식이다. 여름 석 달 동안 콩국수를 세 번 이상 먹지 않으면 더위를 쉬이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콩국수는 예로부터 여름철 꼭 먹어야 할 음식으로 꼽혔다.
국수로도 음료로도 즐기는 여름철 별미
과거 콩국수는 콩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 맷돌에 곱게 갈아 만드는 손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믹서기 덕에 조리 과정이 간단해져 언제 어디서든 해 먹기 좋은 음식이 됐다. 조리 하루 전날 밤 콩을 불려둬야 한다는 점만 기억하자.
콩국수 기본 재료는 소면, 콩, 소금이 전부다. 콩은 백태(메주를 만드는 데 쓰는 노란 콩), 서리태(검은콩), 완두콩 모두 괜찮다. 이번에 사용할 콩은 일반적으로 콩국수를 만드는 데 쓰이는 백태다. 여기에 고명으로 올릴 오이, 잣까지 준비하면 금상첨화다. 고소한 맛을 내기 위해 깨나 땅콩을 추가하는 조리법도 있지만, 기본 재료인 콩 고유의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다른 부재료는 최소화한 레시피를 소개한다.
먼저 콩국을 만드는 방법이다. 콩국수 조리 하루 전날 밤, 콩을 깨끗이 씻고 콩이 모두 잠기도록 물을 부어 반나절 정도 불린다. 이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콩을 삶아도 되지만, 자칫 잘못 삶으면 메주 냄새가 날 수 있으니 되도록 콩은 전날 밤 불려둔다. 다음날, 배로 불어난 콩을 그대로 냄비에 넣고 딱 세 번 끓어오를 때까지 삶는다. 삶을 때 물이 모자라면 물을 조금 추가한다. 삶은 콩은 열을 식혀 믹서기에 넣고 간다. 콩을 삶으면서 우러나온 콩물 그대로 넣고 갈아야 더 깊은 맛의 콩국이 된다. 콩국의 농도는 콩을 갈 때 물 양을 가감하며 조절할 수 있다. 걸쭉한 국물을 좋아하면 물 추가 없이, 후루룩 넘어가는 맑은 국물을 좋아하면 물을 더 넣고 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콩국을 삶은 소면에 붓고 채 썬 오이와 잣을 고명으로 올리면 여름철 별미 콩국수 완성이다. 자신의 입맛대로 소금을 조금씩 넣어보며 간을 맞추면 된다. 콩에 소금 짠맛이 더해지면 콩 특유의 고소한 맛이 더 살아난다. 간단한 조리를 위해 콩 껍질을 벗겨내는 과정을 생략해서 정석대로 만든 콩국에 비해 식감은 약간 거칠지만, 이 나름대로 고소함이 있다. 더 부드러운 식감을 원하면 콩을 삶기 전에 콩 껍질을 벗기는 과정을 추가하면 된다. 삶은 콩에 자꾸 손을 대면 손의 열기 때문에 맛도 변하고 상할 수 있으니 반드시 불린 콩 상태에서 껍질을 까도록 한다.
여름철에는 고온다습한 날씨로 음식이 잘 상하기 때문에 먹을 때 늘 조심해야 한다. 특히 콩국은 냉장 보관을 해도 금방 상하니 만든 후 얼른 먹는 것이 상책이다. 콩국수를 만들어 먹고 남은 콩국은 방부제와 첨가물이 들지 않은 두유와 다름없다. 시원한 음료처럼 마시며 영양도 보충하고 더위도 이겨내자.
재료 소면 1줌, 불린 콩 1 1/2컵, 물 3컵, 오이 1/2개, 잣 1큰술, 소금 1/2큰술
1. 소면을 삶아 찬물에 헹궈둔다.
2. 불린 콩을 삶아 열을 식힌 뒤 믹서에 간다.
3. 오이는 채를 썬다.
4. 그릇에 소면을 담고 콩국을 부은 후 잣과 오이를 올린다.
사진. 유동영
법송 스님
대전 영선사 주지. 세계 3대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 런던캠퍼스 정규 교육과정 최초로 사찰음식 강의를 진행했다. 저서로 『법송 스님의 자연을 담은 밥상』(2015, 서울문화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