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彌勒] 오! 미륵, 지상 낙원 꿈꾸는 민중의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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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彌勒] 오! 미륵, 지상 낙원 꿈꾸는 민중의 밥
  • 백승종
  • 승인 2021.04.2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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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의 거룩한 계승
동쪽과 서쪽 약 200m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두 미륵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6호)’. 
얼어붙은 옥룡천을 건너 1년에 한 번 회포를 풀고 새벽닭이 울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남녀상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성호 이익이란 선비가 있었다. 그의 책 『성호사설』(제5권)에 ‘용화(龍華)’라는 짤막한 글이 있다. 그 글에 나오는 용화는 불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경에서는 미륵이 천상의 도솔천에 머물면서 중생에게 설법하고 있다. 장차 먼 미래에는 미륵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서 세 차례 설법을 베풀 것이고, 그러면 억만 대중이 윤회의 사슬에서 풀린다고 한다. 그런데 이익이 쓴 글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민중의 판타지가 ‘용화’에 담겨 있다.

이야기를 간추려본다. 실학자 이익은 경기도 안산의 들판에 살고 있어 샘을 파지 못했다. 그곳 사람들은 장마철 빗물을 웅덩이에 가두고 ‘용화(龍華)’라고 불렀다. 그 웅덩이에는 기러기와 거위 등이 모여 놀았다. 새 똥과 오줌이 물 위에 둥둥 떠 있어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그 물로 밥도 짓고 술도 빚었다. 때 묻은 옷을 세탁했다. 맛도 그만이요, 수종다리 병 따위의 풍토병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었다.

겉보기와 달리 안산의 용화는 민중의 생명수였던 것이다. 미륵은 풍토병에서 몸과 마음을 구제하는 민중의 은인이었다. 이익 자신의 글에 그렇게 쓰지는 않았으나, 행간의 뜻으로 보면 더 명백하지 않은가. 

이 짤막한 글에서 미륵신앙의 역사를 쓰려고 한다. 아마 조금 색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민중의 마음은 시대의 물결에 따라 미륵신앙을 안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살았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노라면 민중이 남몰래 쓴 거룩한 판타지가 보인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 항상 한 가지 생각을 붙들고 있었다. 미륵신앙은 한국의 역사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을까, 하는 호기심이다. 시대마다 민중의 미륵신앙은 색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그 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면에는 제약이 있기 마련이라, 주석도 붙이지 못하고 그저 몇 가지 이야기를 꺼내는 정도에 그쳤다. 어진 독자의 혜량을 빈다.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우선 말해둘 것이 있다. 한국에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미륵의 인기가 항상 높았다는 점이다. 현재 전국 각지에 남아 있는 미륵상은 400기쯤이란다. 그밖에도 자연석에 조금만 인공이 가해져도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미륵이라고 부른다. 미륵은 마을 앞에도 있고, 논밭이나 호젓한 산기슭에도 있다. 민중의 사랑을 받아온 존재라는 점을 구구히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섬이든 육지든, 산간이든 평야든, 아니면 해변 마을이든 미륵신앙은 어디나 현재진행형이다.

 

고대부터 민중을 먹여 살렸다

미륵신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늦어도 6세기부터는 이 땅에서 미륵신앙이 존재하였다. 571년(고구려 평원왕 13년)에 조성된 삼존상[辛卯銘 三尊像]이 좋은 본보기이다. 이 불상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다시 태어나 미륵불을 친히 만나시기를 희망한다는 글귀가 적혀있다. 불경에 기록된 고전적인 미륵신앙이 아닌가.

그런데 그 시절에도 미륵불은 민중의 가슴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574년(진흥왕 35년) 신라의 경주 황룡사에 미륵불(‘장육상’)을 봉안하였다. 그 이듬해 봄과 여름에 가뭄이 심해지자 미륵불이 눈물을 흘려 발꿈치까지 적셨다. 미륵불은 왜, 그렇게 많은 눈물을 쏟았을까. 민중의 고난을 유독 슬퍼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민중은 이미 미륵불을 자신들의 구원자로 믿었다는 이야기다.

미륵불은 민중의 가슴속에서 농업의 수호신으로 바뀌었다. 760년(경덕왕 10년) 4월, 경주 하늘에 열흘 동안이나 두 개의 해가 떴다. 마침내 월명사(月明師) 스님이 ‘도솔가’를 지어 부르고 꽃을 뿌리자 문제가 해결되었단다. 스님의 노랫말에, “너희는 참 마음이 시키는 그대로 미륵님을 모시어라”라는 구절이 보인다. 알다시피 해(태양)는 농사에 가장 중요하다. 만약에 하늘의 해가 괴이한 모습을 보이면 농사도 파탄 나고 세상도 끝장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미륵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판타지였다.

이 땅에 미륵하생신앙의 전성기를 가져온 이는 진표 스님(8세기)이었다. 스님과 관련된 미륵불 이야기 하나가 흥미롭다. 그때 강원도 강릉(명주)에 흉년이 들어 민중이 굶어 죽게 되었다. 진표 스님은 미륵불에게 기도하고 법회를 크게 열었다. 그러자 바닷가에 수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민중은 그 물고기를 팔아서 식량을 마련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도 미륵불은 민중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존재였다. 농사에 알맞은 날씨를 선사하는 영험한 힘도 자주 보여주었다고 전한다. 1835년(헌종 원년) 강원도 삼척 군수는 봉황산 아래 미륵불을 모셔서 요사한 기운을 막아냈다. 수년 뒤 무지한 군인들이 미륵불을 강물에 떠밀어버렸다. 그러자 가뭄이 계속되었고, 이를 안 마을 사람들이 미륵을 제자리에 다시 모셨다. 즉시 비가 풍족하게 내려 그해 농사가 잘되었다. 미륵불은 곧 민중의 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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