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무기력, 혐오, 갈애, 위선… 마음속 동요에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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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무기력, 혐오, 갈애, 위선… 마음속 동요에 던지는 질문
  • 김준호
  • 승인 2021.02.24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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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장애물

알라라 깔라마(Āḷara Kālā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āmaputta)의 곁을 떠난 싯다르타는 마가다국의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우루벨라의 네란자라 강이 흐르는 곳에 머물며 홀로 정진한다. 선정(禪定)을 닦으며 깨달음의 성취에 가까워질 무렵, 그의 눈앞에 ‘마라 빠삐만’(Māra pāpiman, 魔王 波旬)이라는 마왕이 나타난다.

 

마왕과 싯다르타의 ‘공덕’ 차이

악마가 나타나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방해한다는 설정은 붓다의 생애를 전하는 거의 모든 문헌에서 빠짐없이 등장한다. 불전문학(佛傳文學)은 ‘부처님 일대기를 아름다운 시와 글로 전해주는 경전’이기에 극적인 감성을 더하여 읽어볼 수 있겠지만, 이 악마라는 비유와 상징에 내재된 의미를 사실적으로 음미하기 위해 초기불교 경전인 『니까야(Nikāya)』와 『아함경(阿含經)』의 서술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숫타니파타』 제3 「대품(大品)」의 「정진의 경(Padhāna-sutta)」에는 악마 나무치(Namuci)가 선정을 닦고 있는 싯다르타를 찾아와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네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은 야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당신이 죽지 않고 살 가망은 천에 하나입니다. 존자여, 사는 것이 좋습니다. 살아야만 공덕을 성취할 것입니다. 그대가 청정한 삶을 살면서 성화(聖火)에 제물을 올린다면 많은 공덕이 쌓이지만, 당신의 노력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애써 정진하는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 힘들며 성취하기도 어렵습니다.”

악마가 나타나 처음으로 건네는 말은 ‘죽음’이다. 쇠약해진 몸을 염려해주면서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끄집어내고 있는 셈이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살아있음이 더 중요한데, 왜 이토록 소중한 목숨을 걸고 정진하느냐는 지적이다. ‘살아야만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는 악마의 말은 싯다르타의 마음을 동요할 만한 힘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에게 선(善)이란 ‘살아있음’이며, 악(惡)은 그 ‘살아있음이 사라져버리는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악마의 말에 싯다르타는 이렇게 반문한다.

“게으름[放逸]의 친구여, 악한 자여, 어떠한 목적으로 이 세상에 왔는가? 털끝만큼의 공덕을 이루는 것도 내게는 필요가 없다. 공덕을 필요로 하는 자, 그들에게 악마는 말해야 하리라. 내게는 믿음이 있고, 정진이 있고 내게는 또한 지혜가 있다. 이처럼 스스로 노력을 기울이는 나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삶의 보전에 관해 묻는가?”

공덕(功德, puñña)의 사전적인 뜻은 좋은 것, 즉 ‘복(福)’을 가리키지만 종교적인 의미가 부여되면 ‘선행(善行)’ 또는 ‘선업(善業) 쌓기’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청정한 생활[梵行, brahmacariya]’, 곧 평생 홀로 살면서 성관계하지 않는 규율을 지키거나, 성스러운 불을 피워 신(神)에게 제물을 올려 기도하는 방식으로 선업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 악마가 이해한 공덕이다. 이와 같은 공덕의 성취는 바라문교로 대표되는 당시 인도의 종교전통에서 추구하는 길로 보다 확실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에 비해 싯다르타는 그 누구도 성취한 적 없는 깨달음을 얻는 길, 열반을 성취하는 길을 추구하기에 완성에 도달하기 어렵다. 악마는 그 점을 강조해 싯다르타를 포기하게 만들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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