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에 불법이 머무니 삼년산성 함성 끊겼네,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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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에 불법이 머무니 삼년산성 함성 끊겼네, 보은
  • 노승대
  • 승인 2023.09.21 09: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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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담아둔 절]
보은 법주사 전경

남북한이 갈라지고 나서부터 남한 국토의 중간지점은 어디였을까? 전국 어디에서나 비슷한 시간대에 갈 수 있는 곳, 명산과 명찰 그리고 너른 평지가 있어 많은 사람을 받아줄 수 있는 곳, 바로 보은 속리산이다. 

그 시절 최고의 숲길은 오리숲이었다. 숙박 단지부터 법주사 입구까지 연결된 숲길은 오리(五里, 2km)쯤 된다 해서 오리숲으로 불렸다. 아름드리 소나무들과 벚나무, 전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뒤섞인 숲길은 넓고 쾌적하고 싱그러웠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이 길을 걸어서 들어갔다. 자동차 소리가 끊어진 숲길이니 누구나 안심하고 느긋하게 걸을 수 있었다. 

 

길상초가 자리한 터전

법주사는 신라 553년(진흥왕 14) 의신조사가 창건했고, 776년(혜공왕 12) 진표율사의 제자들이 중창했다. 절 이름을 법주사(法住寺)라 한 것은 의신조사가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들어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불법이 머무는 절’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금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사천왕문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근년에 개금불사를 마친 금동미륵대불이 눈부신 위용을 자랑한다. 법주사는 국보 3점, 보물 13점, 시도유형문화재 2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법주사 일원은 명승(名勝)으로, 법주사는 사적으로도 지정돼 있다. 어디 한 곳 허투루 볼 곳이 없는 사찰이다. 당연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높이 솟은 전나무 두 그루가 앞에 서 있는 사천왕문에는 소조 사천왕상이 큰 키를 자랑하며 서 있다. 어느 자료에나 신라 553년(진흥왕 14)에 처음 세워진 법주사의 정문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금강역사가 있는 금강문이었을 것이다. 사천왕문은 고려 말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철당간도 다른 사찰처럼 금강문 밖 외곽에 있었으나 사천왕문이 들어서면서 금강문이 더 앞으로 나오게 되고 철당간도 경내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법주사는 정유재란(1597) 때 석조물만 남기고 모두 소실됐고 종전 후 다시 복원했다. 사천왕문도 1624년(인조 2)에 벽암대사가 중건했으니 사천왕상도 이때 조성됐다. 이 사천왕상은 키가 5.7m에 이르는 큰 입상들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사천왕상은 17개 고찰에 남아 있지만 높이가 전부 3~4m에 지나지 않는다. 2개 사찰을 빼곤 사천왕상이 전부 좌상이기 때문이다. 

사천왕의 키가 크면 건물도 커지기 마련이어서 다른 건물들과 비례가 안 맞을 수도 있다. 법주사 사천왕문도 정면 5칸, 측면 2칸의 높은 건물이다. 그러나 사천왕문을 들어가며 마주하는 건물이 바로 팔상전이다.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 탑으로 높이가 22.7m에 이른다. 사천왕문과의 비례도 잘 맞는다. 결국 목탑의 높이를 감안해 사천왕문의 높이도 맞췄고 사천왕상도 입상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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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범 2023-09-28 13:32:17
법주사, 백양사,대흥사,한국 문화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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