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강화도 사찰과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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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강화도 사찰과 절터
  • 주수완
  • 승인 2022.08.3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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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어서 더 찬란한,
강화 사찰기행
선원사지

 

섬에서 시작된 사찰들

강화도 사찰들은 모두 몽골 침입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미 삼국시대까지 창건 설화가 올라가는 절들도 많다. 최강의 몽골군도 건너오지 못할 만큼 접근이 어려웠던 이 외진 섬에 어떻게 절이 들어서게 됐을까? 고려가 강화도를 조정의 피난처로 선택한 데에는 몽골군이 해전에 취약하다는 것과 개경에서 뱃길로 가깝다는 이유 외에도 이곳이 살기 좋은 땅이라는 점을 분명 고려했을 것이다. 

강화도는 물이 풍부하고 농사가 잘되는 풍족한 땅이다. 지금도 ‘강화쌀’을 알리는 선전과 함께 드넓은 경작지를 발견할 수 있다. 뭍에서 거둬들인 조세는 강화도 조정을 운영하는 중요 재원이었지만, 혹시라도 몽골에 의해 조세가 끊겼더라도,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정도의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따랐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찰들도 섬 주민들의 보시와 시주로 오래전부터 운영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나아가 강화도 사찰들의 창건 설화를 보면 뭍의 절들이 섬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절은 강화도에서 시작해 뭍으로 건너갔다고 보는 편이 옳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아도 스님이나 인도에서 건너온 어떤 스님은 강화도를 일종의 포교 전초기지로 삼았다.

지금도 강화도에는 대략 15개소 정도의 사찰이 운영되는데, 이 중에서 강화도의 역사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들러야 할 사찰 몇 곳을 섬의 중부, 남부, 북부로 나눠 소개한다.

 

강화의 법보사찰, 선원사지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들어간다면 우선 선원사지부터 들러보자. 한때 이곳은 강화도 도읍 시절 고려의 궁궐터로도 추정된다. 그러나 발굴로 이곳이 절터였고, 더불어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했던 선원사의 터임이 분명해지면서 현재는 선원사라는 절도 운영되고 있다. 한동안은 이곳에서 팔만대장경판을 제작했던 것인지, 아니면 남해에서 제작했던 것인지 논란이 됐다. 그러나 지금은 대체로 조성은 남해에서 하고, 강화로 옮겨와 이곳에 봉안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터로만 남아 있지만,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했던 곳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존재감이 남다르다.

여러 단의 석단이 계단식으로 점차 높아지는 가람 구성은 해인사와 닮았다. 장중한 첫 번째 석단의 계단을 오르면 두 번째 석단은 가운데에 계단을 두고, 좌우에도 역시 계단이 설치된 돌출부가 보인다. 또한 가운데 계단과 좌우 계단 사이는 땅이 약간 움푹 파여 있다. 이 모습은 마치 일본 사이후쿠지(西福寺)에 소장된  <관경16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에 묘사된 극락세계와 닮았다. 

이 그림 속에 묘사된 극락세계를 보면 입구 가운데에 연못이 있고, 이 연못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극락에 태어나고 있으며, 좌우로는 높은 누각이 세워져 있다. 선원사지 두 번째 석단 앞의 움푹 파인 곳도 혹시 연못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좌우로 누각이 솟아 있었다면 그야말로 고려불화 <관경16관변상도>의 극락세계와 유사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불화를 그린 화가가 강화의 선원사지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고려 말 당시 선원사지는 송광사와 더불어 2대 선찰로 위세를 떨쳤으니 그럴 만도 하다.

단 위에 자리 잡은 넓은 중정은 수로로 에워 쌓여 있어, 작은 돌다리로 건너야 한다. 아마도 선원사의 뒤에서 샘솟은 물이 이렇게 공간을 감싸며 흘러내리도록 설계됐던 것 같다. 그만큼 물이 풍부한 섬이었다는 뜻이 아닐까.

여기서 한 단 더 올라가면 금당터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 자리였다. 흥미롭게도 해인사 역시 주불전이 대적광전으로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왜 선원사와 해인사 모두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을까? 해인사는 법보종찰로서 여기서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 즉 경전을 상징한다. 선원사 역시 같은 의미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셨던 것이 아닐까? 

이와 함께 금당 좌우측에 돌출된 부분이 있어 눈에 띈다. 왜 이런 구조가 필요했을까? 흥미롭게도 해인사 대적광전은 정면에만 현판이 달린 것이 아니라 사방에 돌아가며 법보단, 대방광전, 금강계단이란 현판을 달았다. 선원사의 비로전도 정면뿐 아니라 좌우, 그리고 뒷면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렇게 좌우로 돌출된 별도의 단이 설치됐던 것이 아닐까? 

이 비로전 안에 원래는 본존불상이 부석사나 마곡사처럼 법당 한쪽에 치우쳐 봉안돼 있었는데, 고려 제27대 충숙왕 시절에 크게 확장하면서 중앙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옮겼다고 한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태조금강산예불도>를 그린 노영이라는 화가가 금당 안쪽의 정면에 화엄경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55선지식의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상상으로나마 당시의 장중했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그 윗단에는 몇 채의 건물을 ‘冂(경)’ 혹은 ‘ㄷ’자 형으로 배치했다. 이 건물지들이 대장경판을 봉안했던 곳이었을까? 선원사에는 팔만대장경판 외에 거란대장경도 봉안했는데, 팔만대장경을 새로이 조성할 때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려 상자 200여 개 분량의 거란대장경은 후에 송광사로 이운됐지만, 그전까지는 선원사에 상당한 보관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부인사의 초조대장경이 몽골의 침략으로 불에 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방화나 화재에도 각별히 신경 썼을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몇 개의 석단으로 층층이 쌓은 곳에 대장경을 보관하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석단들을 각각의 방화벽으로 삼았던 것이 아닐까 추정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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