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사찰을 건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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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사찰을 건립하다
  • 강호선
  • 승인 2022.08.3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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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한 신앙의 공간, 강도江都의 사찰
강화 선원사지

강도, 개경의 불교를 계승하다

1232년(고종 19) 음력 2월 고려 조정은 본격적으로 천도를 논의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몽골군이 개경성 밖에 진을 치고 흥왕사를 공격했고, 광주, 충주, 청주 등 남쪽으로 몽골군이 진격하며 전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위급한 상황 속에 도읍을 옮길 것인가 아니면 개성을 지킬 것인가를 두고 조정에서는 격렬한 논의가 이어졌고 음력 6월 최우는 강화도 천도를 결정했다. 

강화천도는 몽골과 계속 싸우겠다는 정책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당시 최고 권력자이던 최우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조정 내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진행됐다. 바로 다음 달인 음력 7월 6일 장대 같은 장맛비 속에 개경을 떠난 고종은 다음 날 강화도에 들어갔다. 이로부터 개경으로 환도하던 1270년(원종 11)까지 강화도는 고려의 수도였다. 강화천도기 고려 사람들은 강화도를 강도(江都)라고 불렀고, 개경은 구도(舊都)라고 했다. 

강화도에는 도성에 필요한 여러 시설이 만들어졌다. 우선 궁궐과 성곽이 들어섰고, 관청과 절, 종묘도 지었다. 개경에서 들어온 관료들을 비롯한 피난민들도 각자의 살 집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강도는 떠나온 도읍 개경을 모델로 한 곳이었다. “구정(毬庭)과 궁전, 사사(寺社) 등의 이름은 모두 송도(松都, 개경)의 것을 따랐다. 팔관회, 연등회, 행향도량(行香道場)은 하나같이 옛 법식을 따랐다”는 『고려사』의 기록처럼 강도에는 개경과 같은 절이 세워졌고, 개경에서의 국가적인 불교의례도 그대로 개최하고자 했다. 강도를 운영하는 데 있어 실제 지형의 차이, 전시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개경의 구조를 그대로 모방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데에는 개경에서의 경험이 깊이 반영됐다. 강도로 옮겨간 고려 조정은 개경을 잇고 있으며 왕정의 수도로서의 권위도 온전히 계승하고 있음을 표방했고, 이러한 모습은 사찰과 불교의례에서도 잘 드러났다.

 

강도에 지은 여러 절

고려 조정은 천도 직후 궁궐과 성곽 등 주요 시설을 건설했다. 그중에는 봉은사가 포함돼 있었다. 개경의 봉은사는 태조진전이 있어 고려 조정과 왕실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절이었다. 진전(眞殿)이란 선대 국왕이나 왕비의 초상화나 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며, 진전을 둔 절을 진전사원이라 한다. 고려에서는 광종이 아버지 태조 왕건의 진전사원으로 봉은사를 창건한 이래 국왕과 왕비의 진전사원을 운영했다. 특히 봉은사의 태조진전은 고려 국왕의 정통성 및 태조신앙과 관련해 각별한 의미가 있는 국가적인 성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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