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감춘 암자] 추월산 보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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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감춘 암자] 추월산 보리암
  • 유동영
  • 승인 2022.01.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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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날아온 나무매가 부처님 좌복을 틀어 연리지 느티나무 바위틈
보리암 정상에 서면 동으로 지리산, 남으로 무등산, 북으로 모악산, 서쪽으로 고창의 방장산까지도 보인다.  

1694년에 쓰인 『보리암중수기』에 의하면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1607년 신찬 스님이 중수했다. 그 뒤 『보리암중수기』를 지은 신여도의 증조부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머무른 인연이 있어, 그의 아버지가 1650년에 중수했다. 중수기를 지은 해인 1694년에는 쇠락했던 절을 신여도를 비롯한 몇몇 뜻있는 인사들이 중건했다. 근래에는 1983년에 성묵 스님이 인법당을 중수했고, 1984년에는 주지 영공 스님이 두 보살의 시주를 받아 가람을 갖추고 전기를 시설했다. 시주 보살들의 공덕비는 가파른 나무데크 시작 전 동굴 옆에 세워져 있다. 지금은 주지 원용 스님과 기도와 공양주 소임을 함께 보는 비구니 스님이 산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공부를 할 때다. 3년을 정진하다 초견성을 한 스님은 수행하기에 좋은 터를 찾기 위해 나무로 매를 만들어 전국으로 보낸다. 그 가운데 세 마리만이 땅에 내려앉았다. 한 마리는 송광사에, 또 한 마리는 백양사에, 세 번 째 한 마리는 바로 추월산 보리암에 앉는다. 송광사와 백양사는 이미 가람이 반듯하게 갖추어진 대중 수행 터였으므로, 두 곳은 초견성을 넘어서는 공부가 필요한 스님에게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보리암 터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절벽 틈 사이이기는 했으나 물이 끊기지 않고, 햇빛도 적당히 드는 동남향 석굴이다. 깎아지는 절벽이니 찾는 이도 없어 공부터로서는 여러모로 안성맞춤인 자리였을 것이다. 게다가 산의 형상이 기이해서 담양 쪽에서 보면 머리 깎은 스님의 형상이고, 암자 바로 아래 동네에서 올려다보면, 암자가 앉은 자리는 영락없는 수사자의 머리 부분이다. 암자 아래로 난 계단을 타고 약 30여m만 내려가면 ‘보조국사 토굴’로 전해지는 관음굴이 있다. 이름처럼 지금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이다. 20여 명이 앉아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넉넉한 크기다. 이것을 보아 보조 스님이 지리산에서 내려와 잠시 머무르며 대오를 위해 동굴 수행을 했을 법하다. 

주지 원용 스님은 큰스님의 공부 자리에서 많은 불자들이 기도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내부를 손볼 계획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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