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으로 가는 배 반야용선] 불화 속 반야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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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으로 가는 배 반야용선] 불화 속 반야용선
  • 이승희
  • 승인 2023.11.2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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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용선의 변화
- 자력신앙에서 타력신앙으로

자력왕생과 타력왕생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는 극락으로 가는 왕생자(往生者)가 타고 가는 배를 용의 모습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왕생자만이 용선(龍船)을 타거나, 아미타불과 그 권속이 왕생자를 용선에 태워 서방정토로 인도해 가기도 한다. 배의 머리(선수船首)나 꼬리(선미船尾) 부분, 혹은 배 전체를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용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게 반야용선의 특징이다. 고대부터 영혼의 이동 수단으로 여겨졌던 ‘배’는 불교에 수용됐고, 극락으로 가는 왕생의 방편으로 차용돼 개념적으로 진화했다. 

불교에서 ‘배’는 자력왕생(自力往生)과 타력왕생(他力往生)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비유된다. 아미타여래의 존재 여부는 신앙의 성격이 ‘자력’인가 혹은 ‘타력’인가를 밝히는 중요 열쇠다. 『대방광불화엄경』에서 배(船)는 ‘무량한 공덕과 서원을 위한 방편(方便)’으로 제시된다. 이에 반해 아미타신앙에서는 원선(願船), 아미타원선(阿彌陀願船), 사십팔원선(四十八願船), 대비선(大悲船), 자항(慈航) 등 ‘중생이 정토왕생을 위해 타고 가는 것’에 비유된다. 

일반적으로 왕생자를 서방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반야용선 신앙은 타력적인 성격이 강하다. 즉 왕생하는 데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아미타불의 광대한 자비와 서원에 기대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아미타불의 본원력이 절대적이다. 그런데 용선 앞에 붙은 ‘반야(般若)’는 타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야는 ‘모든 법의 진실상(眞實相)을 체득한 지혜’라는 의미다. 즉 지혜를 깨닫는 과정은 남에게 의지하는 게 아닌, 스스로의 지극한 노력이 동반돼야 한다. 그렇다면 자력과 타력이 공존하는 반야용선이라는 용어는 어떻게 성립됐을까? 불화의 도상으로 널리 그려진 배경은 무엇일까? 이를 역사와 사상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자. 

 

 

[도판 1] <미륵하생경변상도>, 1294년, 일본 묘만지 소장

마음속 불성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반야용선 도상은 묘만지(妙滿寺)에 소장된 1294년 작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이다[도판 1]. 그림 위쪽에는 미륵불이 하생(下生)한 용화회(龍華會)가 펼쳐지고, 아래쪽에는 거칠게 물결치는 바다 위에 두 척의 배가 그려져 있다. 배마다 각각 9명의 왕생자가 승선하고 있다. 서로 마주 보는 배에는 승려와 속인이 함께 탑승하고 있는데, 승려를 제외한 남성과 여성은 각기 다른 배에 타고 있다. 여성의 화려한 머리 장식과 의복, 남성이 쓴 관모 등으로 볼 때 당시 귀족의 모습과 승려의 형상을 염두에 두고 표현한 듯하다. 

[도판 1] 하단의 반야용선 장면

그런데 특이하게도 용선에는 불보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당시 고려불화를 조성할 때 중요한 후원자 계층이었던 승려와 귀족들의 신앙관과 연결된다. 그들은 타력에 의한 극락왕생보다는 자신들의 마음속에 내재한 불성을 깨닫기 위한 자력수행에 더 큰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비로자나불의 법신(法身)을 깨닫고 화엄세계에 들어가서, 
미륵의 비밀스러운 수기를 받아 반야선에 오르소서.
(悟毗盧之法身 入華嚴界 受彌勒之秘記 乘般若船)”
- 『동문선』 권111, 「신총랑오재소(辛惣郞五齋疏)」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었던 이첨(李詹, 1345 ~1405)이 부인의 극락왕생과 성불을 기원하며 지었던 발원문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미륵의 비밀스러운 수기”는 무엇일까? 

미륵을 주존으로 모시는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인간은 진여(眞如)의 완전한 깨달음, 즉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체계적이고 점진적인 보살도의 실행으로 불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미륵이 세존으로부터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성불(成佛)의 수기(授記)를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체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미륵과 마찬가지로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미륵의 비밀스러운 수기’는 곧 일체중생도 성불의 수기를 받은 것이며, 반야선에 올라 정각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다. 

성불로 나아가는 반야선(般若船)의 개념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권근(權近, 1352~1409)의 문집인 『양촌집』에도 기록됐다. 

“선대의 조종고비(祖宗考妣)와 먼저 가신 자서권속(子壻眷屬)과 
법계의 함령(含靈)까지 수승한 인연을 맺어 
반야선에 올라 정각에 다다르길 바랍니다. 
(惟願先代祖宗考妣 先亡子婿眷屬 
普及法界含靈 皆仗勝緣 乘般若舡到正覺岸)”
- 『양촌집』 권22 발어류(跋語類), 「대반야경발(大般若經跋)」

이처럼 반야선은 단순히 극락왕생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도판 2] <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변상도>, 고려 14세기, 일본 엔가쿠지(圓覺寺) 소장, 출처 《숭고한 믿음의 아름다움 -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불교미술》, 도33

고려 후기의 자력수행을 통한 성불을 상징하는 반야선의 도상은, 2023년 규슈박물관에서 개최된 《숭고한 믿음의 아름다움 -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불교미술》에 공개된 <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변상도(佛說觀普賢菩薩行法經變相圖)>[도판 2]에서도 확인된다. 『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은 『법화경』의 「보현보살권발품」의 내용에 이어서 보현보살을 관하는 방법과 공덕을 설한 경전이다. 이 경전의 변상도(부처님의 가르침을 표현하는 그림)에 등장하는 반야용선은 “보현보살이 큰 법의 배에 일체 시방의 한량없는 모든 보살과 함께 건넌다”는 내용에 근거한다. 

즉 이 용선 또한 법의 상징으로, 『법화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을 수지·독송하고 참회행을 하면, 궁극적으로 성불에 이를 수 있음을 설파한다. 이처럼 자력수행을 통한 성불에 대한 관념이 불화의 도상으로 표현됐던 이유는, 고려불화와 사경(寫經)의 주 후원자 계층이 왕실 및 귀족과 승려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근기 높은 상품자(上品者)로 생각했을 것이며, 타고난 마음속 불성을 찾아가는 신앙적 태도를 지녔을 것이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에 의지해서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고려가 무너지고,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구축한 조선이 건국되면서 왕생(往生, 이승을 떠나 정토에서 태어나는 일)에 대한 관념도 점차 변화한다. 반야용선의 도상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그 시기를 15세기 중·후반경으로 추측한다. 

[도판 3] <관경16관변상도>, 15세기, 일본 호린지 소장
[도판 3]의 세부. 왕생자 10여 명과 이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아미타불의 모습

15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호린지(法輪寺) 소장 <관경16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도판 3] 하단에는 용선이 그려져 있다. 화면 하단 중앙, 넘실대는 물 위에 떠 있는 용선 안에는 10명의 왕생자와 이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아미타불이 함께 표현됐다. 용선을 이끄는 주체로 아미타불이 등장한 것은 이전에 없던 현상이다. 

“이러한 공덕을 갖춰 하루 내지 이레 동안 하면 곧 왕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은 저 국토에 태어날 때, 용맹하게 정진한 까닭에 아미타여래께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그리고 무수히 많은 화신불, 백천(百千) 비구와 성문 대중, 한량없이 많은 모든 천인(天人)들과 함께 오시느니라. 7보 궁전에서 관세음보살이 금강대(金剛臺)를 가지고 대세지보살과 함께 수행자 앞에 이르면, 아미타불께서 큰 광명을 놓아 수행자의 몸을 비추시고 여러 보살들과 손을 내밀어 영접(迎接)하시느니라.”
- 『불설관무량수경』

아미타불이 등장하는 왕생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서방에 머물던 아미타불은 왕생자를 맞이하기 위해 현실 세계로 내려와, 왕생자를 접인(接引, 맞이해 이끔)해 극락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미타불이 내영(來迎, 아미타불이 내려와 손을 내밀며 맞이함)한 후 왕생자를 데리고 돌아가는 장면에 용선이 등장한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등장에는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해 왕생하는 타력왕생신앙이 내재했다. 

이러한 타력적인 신앙의 양상은 15세기 중반에 찬집된 『월인석보』 권8 「안락국태자전」에 이미 서술됐다. 

“극락세계에 48 용선(龍船)이 공중에 내려오셔서 중생을 접인(接引)하시니 보살들이 사자좌로 맞아가신다.”

여기서 ‘48’은 『무량수경』에서 중생을 구하기 위해 서원한 법장비구(法藏比丘)의 대원(大願)을 의미한다. 이러한 「안락국태자전」은 왕실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에 유행하면서 불화로도 그려졌다. 1576년 제작된 일본 세이잔분코(靑山文庫) 소장 <사라수탱(沙羅樹幀)>(<안락국태자경변상도(安樂國太子經變相圖)>)[도판 4] 화면의 중앙에는 아미타불과 안락국태자(安樂國太子), 원앙부인(鴛鴦夫人)이 용선에 승선해 서방세계로 왕생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중생과 삿대(강바닥을 긁어서 배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도구)를 든 아미타불을 배치해 ‘내영’과 ‘접인’, ‘왕생’의 주체와 객체가 강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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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4] <안락국태자경변상도>, 1576년, 일본 세이잔분코 소장
(표시한 부분)용선접인 장면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한다’는 정토왕생관은 1582년 일본 라이고지(來迎寺) 소장 <서방구품용선접인회도(西方九品龍船接引會圖)>[도판 5]에서도 확인된다. 상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정토세계를, 아랫부분에는 정토왕생, 즉 용선접인(龍船接引)의 장면이 묘사됐다. 아미타불이 오른손을 내려 합장을 한 채 용선에 타고 있는 여인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 여인은 선조의 어머니인 혜빈정씨(惠嬪鄭氏)로 추정된다.  

[도판 5] <서방구품용선접인회도>, 1582년, 일본 라이고지 소장
(표시한 부분)용선접인 장면

 

‘타력적인 정토왕생관이 조선사회에 정착했다’는 사실은 사명유정(四溟惟政, 1544~1610)의 기록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자력과 타력은 하나는 더디고 하나는 빠르다. 예컨대 바다를 건너가려는 사람이 나무를 심어서 배를 만들려면 더딜 것이다. 이것은 자력에 비유한 것이며, 남의 배를 빌려서 바다를 건넌다면 빠를 것이니, 이것은 타력에 비유한 것이다. 부처님은 신통력을 갖추었으므로 사람이 임종 때에 큰 소리로 염불하면 반드시 와서 맞이하여 갈 것이다.”
 - 『한국불교전서』 7, 『선가귀감(禪家龜鑑)』(1564), 동국대학교출판부 

 

극락세계로 이끄는 ‘염불수행’

조선 후기 불교는 민중이 주체가 된 불교다. 성리학적인 지배 질서가 정착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불교는 기층민 사이에 깊이 뿌리내렸고, 어려운 교리보다는 의식에 치중했다. 일반 대중도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는 ‘염불수행만으로 아미타불의 도움을 받아 극락왕생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삶에 지친 기층민들에게는 내세에 대한 희망을 줬을 것이다. 

[도판 6] <염불왕생첩경도>, 1750년, 영천 은해사 소장
(하단 오른쪽)극락세계에 막 도착한 모습이다. 뱃머리에는 관세음보살이, 선미에는 대세지보살이 있다.

염불이 왕생의 가장 빠른 길임을 표현한 불화가 1750년 제작된 은해사 <염불왕생첩경도>[도판 6]이다. 화면에는 극락세계에 도달한 용선의 모습이 보인다. 용선의 선두에는 관음보살이 인로왕보살의 역할을 대신하고, 선미에는 대세지보살이 삿대를 저어가고 있다. 허공 중에 아미타불 성중은 극락세계에 도착한 용선에 탄 왕생자를 맞이하고 있다. 비교적 큰 용선에는 승려부터 속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약 70여 명의 왕생자가 빈틈없이 앉아 있다. 용선 위에서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아미타삼존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 

극락세계는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극락세계의 중심부에 앉아 계신 아미타삼존의 주변으로 보배로운 나무와 칠보 누각, 기묘한 모습의 극락조들이 노닐고 있다. 또한 상품상생자(上品上生者)를 데려오기 위한 금은 대좌를 주악(奏樂) 천인들이 둘러싼 모습도 보인다.
화면 하부의 향 좌측에는 구품(九品) 연못이 있고, 칠보의 연지에 상품, 중품, 하품의 왕생자들이 그려져 있다. 이 불화에는 염불인을 언급한 다양한 방제가 있다. 

“염불인이 연화 연못에서 태어나다(念佛之人生蓮華池)” 
“불보살이 염불인을 만나다(佛與菩薩接俱接念佛人)” 
“아미타불이 앞에서 염불 중생을 인도하다(阿彌陀佛現前接引念佛衆生)” 
“염불인이 용선을 타고 와 왕생하다(念佛之人龍船往生)” 

이처럼 염불이 극락왕생의 중요한 방편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조선 후기 전국 각지에서 염불신앙이 팽배했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특히 18세기 경북지역에서는 염불을 권하는 정토계 불서들이 간행되면서, 은해사를 포함해 팔공산과 인근 지역에서 염불왕생신앙이 팽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염불수행은 ‘오직 염불만으로도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타력왕생의 핵심적인 수행법인 것이다. 

 

인로왕보살과 지장보살 

타력적인 정토왕생신앙은 수없는 악업을 행한 지옥의 중생에게도 극락왕생에 대한 희망을 줬다. 접인해 용선을 이끄는 주체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외에도 인로왕보살과 지장보살이 등장한 것이다. 인로왕보살은 지옥 또는 중음(中陰, 이생을 떠나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머무는 공간)에서 고통받고 있는 고혼(孤魂)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보살이고, 지장보살은 모든 악업에서 해탈하게 하는 보살로 죽은 자와 산 자를 모두 이롭게 하는 보살이다.

고혼을 불보살의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보살인 인로왕보살이 등장하는 작품으로는 제천 신륵사 <반야용선도>가 있다. 일반적으로 감로도(甘露圖)에 표현된 인로왕보살은 번을 들고 있지만, 신륵사 벽화에서는 삿대를 들고 있다. 망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배의 선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용선의 뒤쪽에는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삿대를 들고 노를 저으며 인로왕보살을 도와 극락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인로관음(引路觀音)’이라는 방제는 ‘극락가는 길의 안내자’로서 관음의 성격을 명시하고 있다.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

조선 후기 반야용선도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용선에 매달린 거룻배와 왕생자들의 표현이다. 신륵사 <반야용선도>의 용선에는 정면향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승려 무리와 관복을 입은 한 사람이 앉아 있다. 주선에 연결된 작은 거룻배에는 수많은 일반대중이 빈틈없이 자리를 메우고 있다. 거룻배는 용선에 연결된 밧줄에 의지해 위태롭게 이끌려 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장면에는 승려는 물론이고 평소 불법과 인연이 먼 하근기(下根機)의 일반대중들까지도 촘촘히 모여 있다. 더 많이 함께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포용적인 정토관과 용선에 매달려서라도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

[도판 7] 안산 청룡사 <반야용선도>, 조선 19세기, 사진 불광미디어
대웅전 내부 벽면에 있다. 아미타부처님이 가운데 있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굿중패 모습을 한 왕생자들 모습이 그려져 있다.

왕생자들의 모습도 한층 다양해진다. 안성 청룡사 내부 벽화에 그려진 반야용선[도판 7]에는 휘장으로 이루어진 선실을 표현했다. 특이하게 인로왕보살과 지장보살 대신에 앞뒤에서 노를 젓는 이가 남녀 2인이다. 뱃머리에서 노를 젓는 여인과 그 뒤로 남색 모자를 쓰고 굵은 염주를 목에 건 인물들도 보인다. 그중 한 인물은 소고를 머리 위로 들고 두드리는 모습이 표현됐다. 굿중패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안성 청룡사에는 남사당 바우덕이패가 기거하면서, 큰 불사가 있을 때마다 전국을 떠돌며 굿과 놀이를 하고 시주금을 마련해 줬다. 굿중패의 인물들을 왕생자로 표현한 것은 기댈 곳 없는 천민들까지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조선 후기 청룡사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연희문화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도판 8] <관음사 후불도>, 1940년, 제주 관음사 소장, 사진 문화재청
오른쪽 하단에 반야용선이 그려져 있다. 지장보살이 뱃머리에 있고, 인로왕보살은 가운데 있다.

반야용선에 일제강점기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1940년 조성된 <관음사 후불도>[도판 8]에는 아미타삼존과 권속·지옥도·반야용선도까지 표현됐는데, 이러한 구성은 흔치 않다.

반야용선이 표현된 아래를 살피면, 아미타부처님이 2명의 남녀를 굽어보고 있고, 주악 천녀들은 극락왕생의 기쁨을 표현하듯 흥겹게 악기를 연주한다. 이들은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세계에 도달해 아미타부처님을 바로 앞에서 뵙고 있다. 흰 연꽃을 들고 있는 여인은 머리를 부풀려 풍성하게 했고, 기모노를 입은 모습이다. 전통적인 일본 복식을 입은 여인이다. 팔을 높이 들어 영지버섯을 바치는 남자는, 머리에 관모를 쓰고 소매가 넓은 도포를 입고 있다.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그 옆으로 지장보살이 선두에서 반야용선을 이끌고 있다. 용선 안에는 한쪽 어깨를 드러낸 여래가 앉아 있고 앞에서는 인로왕보살이 번을 들고 서 있다. 여래를 향해 합장하는 왕생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역시 신분이 높은 듯하다.

배의 뒤쪽에는 칼을 든 험악한 인상의 귀졸(鬼卒)이 배 위에 오르려는 사람들을 배에 오르지 못하게 밀치고 있다. 쪽머리를 한 여인은 붉은 저고리와 녹색 치마를 입고 있다. 조선 여인임을 알 수 있다. 민머리 남성은 도포를 입고 있으나 평범한 신분의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극락왕생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있음에도 용선에 오를 수 없는 평범한 남녀 2인을 표현했다. 

반야용선을 타고 아미타부처님을 만나는 남녀는 신분이 높거나 일본인 복장으로 표현되고, 용선에 오를 수 없는 인물은 평범한 조선인으로 표현했다. 신심이 깊어도 반야용선에 오를 수 없던 것일까? 불화는 이렇게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도 한다.  

 

이승희 
고려시대 아미타정토불화 연구로 홍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 용인대, 단국대, 충북대 등에서 강의, 불교미술사학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양미술사학회 부회장, 경기도, 충청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수리기술위원, 덕성여대 연구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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