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조명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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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조명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 동명 스님
  • 승인 2022.01.11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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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새벽, 금선대.
새벽, 금선대.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한번, 태어나 볼까요?
아랫녘으로 내려갈수록 물색 짙어지는 봄날
태양은 빛의 구멍을 열어 색의 연풍을 보내 주어요
나는 바야흐로 색의 씨앗, 당신은 빛의 씨앗
흠 없는 외로움 흠 없는 그리움을 서로 알아요
애초의 어둠 속 반짝임을 알아요
반짝임은 사랑의 핵, 생명을 만들죠
수원 떠나 옥천 지나 금강 건너 금산 골짜기 돌샘
애타는 당신 지상의 이슬방울들 물들일 때
초록 목덜미와 다홍 가슴으로 발색하는 그리움
청홍 자웅 아지랑이 진동합니다
나는 바야흐로 몸의 씨앗 당신은 존재의 씨앗
토우의 심장에 숨결을 불어넣는 가루라(迦樓羅)처럼
귓불 지나 유두 지나 소름 돋는 합일의 벼락처럼
당신,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태양이 먼지로 사라질 때까지 벗을 수는 없죠
한 마리 자연 속 한 마리 자연으로
한번, 태어나 볼까요?

(조명 시집,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민음사 2020)

연꽃.
연꽃.

[감상]
우리 몸이 죽어 사라져도 업식(業識)은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 업식이 꼭 맞는 인연을 만나면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 과정을 시적 상상력으로 그린 시입니다.

업식을 시인은 ‘색의 씨앗’이라 부르기도 하고, ‘몸의 씨앗’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업식이 만나야 할 인연은 ‘빛의 씨앗’, ‘존재의 씨앗’으로 불렀습니다. 용어의 적합성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시어는 적합하지 않아도 괜찮을 자유를 부여받았으니까요.

‘색의 씨앗’이 “한번, 태어나 볼까요?” 하고, 태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냈습니다. 시인이 보기에 ‘색의 씨앗’이 태어나고자 하는 이유는 외로움입니다. ‘빛의 씨앗’이 ‘색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리움입니다. ‘색의 씨앗’을 자식으로 보고 ‘빛의 씨앗’을 어머니로 보면,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자식은 외로워서 새로운 인연이 될 어머니를 찾고, 어머니는 자신을 인연으로 올 생명이 그리워서 자식을 원하게 됩니다.

‘색의 씨앗’은 자신의 인연처를 찾아 남쪽으로 갑니다. 시인은 ‘색의 씨앗’이 자신의 인연처로 “수원 떠나 옥천 지나 금강 건너 금산 골짜기 돌샘”을 선택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금산 골짜기 돌샘은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합니다.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골짜기 돌샘에서, “애타는 당신 지상의 이슬방울들 물들일 때/ 초록 목덜미와 다홍 가슴으로 발색하는 그리움/ 청홍 자웅 아지랑이” 진동하는 지극히 아름다운 배경이 조성됩니다.

바로 거기서 ‘색의 씨앗’과 ‘빛의 씨앗’ 사이의 아름다운 거래, 아름다운 합일, 아름다운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나는 몸을 만들어낼 씨앗을 가지고 있고, 당신은 그 몸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루라(가루다)는 인도 유지의 신 비쉬누의 자가용입니다. 비쉬누는 가루라를 타고 어디든 날아갈 수 있지요. 토우에게는 가루라가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가 봅니다. 비쉬누의 뜻에 따라 가루라가 토우의 심장에 생명을 주듯이, ‘빛의 씨앗’은 ‘색의 씨앗’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아닙니다. ‘색의 씨앗’이 ‘빛의 씨앗’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당신,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그렇게 ‘색의 씨앗’은 생명을 부여받으면서, “태양이 먼지로 사라질 때까지 벗을 수는 없죠”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태어나면서, (태어나는 순간은 기억하지 못하니, 어린 시절이라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우리의 생명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이 시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과정을 거쳐 태어났는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뿐만이 아니지요. 모든 생명체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업식이, 그의 외로움이 “한 마리 자연 속 한 마리 자연으로/ 한번, 태어나 볼까요?”라는 마음을 먹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에 왔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그렇게 왔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과정을 통해 만들어낸 ‘나라는 생명체’, 잘 모시고 살겠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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