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박형준 ‘저녁나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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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박형준 ‘저녁나절’
  • 동명 스님
  • 승인 2022.05.03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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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건물들 사이로 저무는 해
건물들 사이로 저무는 해

저녁나절​

반지하 창문 앞에는
늘 나무가 서 있었지
그런 집만 골라 이사를 다녔지
그 집들은
깜빡 불 켜놓고 나온 줄 몰랐던
저녁나절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었던가
산들바람이 부는 저녁에
집 앞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서성대며 들어가지 못했던가
능금나무나 살구나무가 반지하 창문을
가리던 집,
능금나무는
살구나무는
산들바람에
얼마나 많은 나뭇잎과 꽃잎을 가졌는지
반지하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떨어지기만 했지
슬픔도 환할 수 있다는 걸
아무도 없는데 환한
저녁나절의 반지하집은 말해주었지​

불 켜진 저녁나절의 창문을 보면
아직도 나는 불빛에 손끝이 가만히 저린다​

​(박형준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창비 2020)

두물머리를 내려다보는 수종사 은행나무에 지는 석양
두물머리를 내려다보는 수종사 은행나무에 지는 석양

[감상]
한때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던 거주 형태는 반지하방이었습니다. 캄캄한 계단을 내려가야 들어갈 수 있는 방, 눅눅해서 벽지에 곰팡이가 슬곤 했던 방, 캄캄하여 낮에도 불을 켜야 했던 방, 그런 방을 정읍에서 상경한 박형준 시인도 오래 사용한 모양입니다.

반지하 창문 앞에는 늘 나무가 있었답니다. 아니 그런 집만 골라서 이사를 다녔답니다. 그나마 창문 앞에 나무가 있는 것이 위안이 되었나 봅니다.

늘 불을 켜고 있었던 방에서 나올 때 불을 끄는 것을 깜박하고 나오는 경우도 있지요. 저녁나절 집에 와서야 깨닫습니다. ‘내가 불을 켜고 나갔었네.’ 혼자 살았기 때문에 누군가 집에 와 있을 리 없지요. 어차피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방 앞에서 시인은 ‘산들바람이 참 좋구나’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나무 주위를 서성입니다.

“능금나무나 살구나무가 반지하 창문을
가리던 집,”

그런 집에서 살면서 시인은 그래도 능금나무와 살구나무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생각하며 떨어지는 나뭇잎을 세기도 했지요. 그 나무들은 얼마나 많은 나뭇잎과 꽃잎을 가졌던지 떨어져도 떨어져도 또 떨어질 잎들이 있어서 한없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불빛이, 그 나뭇잎이, 시인에게 크나큰 위안이어서 들어가고 싶지 않은 방을 갖고 있었지만, 견딜 수 있었습니다. 가끔은 슬픔의 빛도 이렇게 환할 수 있구나 느끼면서.

지금 시인은 그런 집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불 켜진 저녁나절의 창문을 보면” 시인은 불빛에 손끝이 ‘가만히’ 저립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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