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김용택 ‘구절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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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김용택 ‘구절초꽃’
  • 동명 스님
  • 승인 2021.10.1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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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필자의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북한산 중흥사에 핀 구절초. 동명 스님이 찍어둔 사진 갈무리.
북한산 중흥사에 핀 구절초. 동명 스님이 찍어둔 사진 갈무리.

구절초꽃

하루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로
산그늘을 따라서 걷다 보면은
해 저무는 물가에는 바람이 일고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하루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에
산 너머 그 너머 검은 산 넘어
서늘한 저녁달만 떠오릅니다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에
달빛만 하얗게 모여듭니다
소쩍새만 서럽게
울어댑니다

(김용택 시집 ‘나무’, 창비 2002)

해마다 9월이면 공주 영평사 지천에 피는 구절초.
해마다 9월이면 공주 영평사 지천에 피는 구절초.

[감상]
이 시를 읽고 눈을 감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았던 구절초꽃들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뒹굴며 놀던 양지바른 무덤가에 소담히 핀 구절초꽃, 보성강 강가 논둑에서 강물 속에 그림자를 빠뜨린 구절초꽃, 보초를 서다가 바라보던 달빛을 살포시 머금은 구절초꽃, 문을 열면 바라다보이는 중흥사 도총섭 앞의 구절초꽃, 그렇게 제 마음은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이런 것이 시구나!
이런 것이 시의 힘이구나!

읽으면서 저절로 음률을 붙이게 되는 시, 읽으면서 저절로 그림이 그려지는 시, 다 읽고 나면 저절로 눈을 감게 되는 시, 바로 이 시가 그런 시입니다.

하루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에 시인은 산책을 나갔습니다. 산 너머, 그 너머, 해가 지면서 푸른 산이 검은 산이 되었을 때, 검은 산 너넘 서늘한 저녁달이 떠오릅니다. 그 시각, 강가에서 구절초꽃을 보셨는지요?

구절초꽃 새햐안 구절초꽃에
달빛만 하얗게 모여듭니다
소쩍새만 서럽게
울어댑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기만 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서러움도 있어서, 안타까움도 있어서, 그리고 구절초꽃이 있어서, 구절초꽃 옆에 강물이 흐르고 있어서, 그것을 바라다보는 내가 있어서 아름답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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