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김해진 ‘꽃무릇’
상태바
[시가 말을 걸다] 김해진 ‘꽃무릇’
  • 동명 스님
  • 승인 2021.09.27 13: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번 주부터 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필자의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선운사에 핀 꽃무릇. 청목 스님 제공.
선운사에 핀 꽃무릇. 청목 스님 제공.

꽃무릇

잎 없이 피어도
외로워하지 않고
흔적 없이 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세상에 뿌리는
억장 무너지는
너의 사랑 이야기
발길 멈추고
듣다가
읽다가
내 심장도 노을로 타오른다
(김해진 시집 ‘오월붓꽃’, 엠아이지 2015)

[감상]
가령 잎 없이 피는 꽃과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배경 없이 성공한 사람이 바로 잎 없이 피는 꽃과 같은 사람 아닐까요?

집안도 별 볼 일 없고, 좋은 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자신과 가족이 모두 가난하고, 잘된 친구도 없는 사람이 세상을 화들짝 놀라게 할 정도의 업적을 만든 경우 있지요. 그런 사람이 잎 없이 피는 꽃과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이파리 없이 피는 꽃은 많습니다. 이른 봄에 피는 꽃은 대부분 이파리보다 먼저 꽃이 피고 꽃이 질 무렵에 이파리가 피어납니다. 그러나 꽃과 이파리가 아예 만나지 못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파리 없이 꽃대만 올려서 꽃대 끝에 꽃을 피우는 상사화나 꽃무릇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유입니다.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것을 사람들은 일종의 상사병과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사화와 꽃무릇을 ‘이루지 못한 사랑의 상징’으로 보고 애틋한 시선을 쉬 거두지 못합니다.

김해진 시인은 간명하면서도 애절한 시어로 꽃무릇의 애틋한 이미지를 그려냈습니다.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세상에 뿌리는/ 억장 무너지는/ 너의 사랑 이야기”
꽃무릇의 이미지에 걸맞는 탁월한 표현입니다.

선운사에 핀 꽃무릇. 청목 스님 제공.
선운사에 핀 꽃무릇. 청목 스님 제공.

선운사에 계시는 도반스님께 사진 찍어 보내달라 했더니, 참 많이도 보내셨습니다. 도반스님도

발길 멈추고
듣다가
읽다가

사진을 찍으셨을까요? 그러다가 “내 심장도 노을로 타오른다” 하면서 앗 뜨거라, 사진이나 찍자 하셨을까요?

꽃무릇을 통해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그려보는 것은 건강합니다. 그렇게 꽃무릇을 감상하는 것은 바로 ‘시를 사는 것’이지요. 
사랑을 통해 괴로워하지 마시고, 사랑을 통해 행복해지시기 바랍니다.
괴로워지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행복해지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9월 중순 촬영된 고창 선운사 꽃무릇 사진은 필자의 도반 청목 스님이 보내주셨습니다.
※9월 26일 기준, 선운사 주변 꽃무릇 군락은 온통 붉은 비단을 깔아 놓은 듯 만개했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