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장석남 ‘긴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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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장석남 ‘긴 의자’
  • 동명 스님
  • 승인 2021.11.2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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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스승 법정 스님에 이어 불일암을 지키며 정진하고 있는 맏상좌 덕조 스님이 의자를 매만지고 있다.
스승 법정 스님에 이어 불일암을 지키며 정진하고 있는 맏상좌 덕조 스님이 의자를 매만지고 있다.

긴 의자

오랜 동안 비어 있는
긴 의자 하나
午前엔 새가 한 마리 모퉁이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대다 간
새가 혼자 앉기에는 너무 큰 긴 의자
종일 햇빛만 앉아 있는
긴 의자

새가 그 맑은 눈으로 곰곰 궁금해했던 것이
離別에 대해서였다는 것을 나는
밤이 다 늦어서야 알고
다시 내다보는
긴 의자

오세요
앉았다 가세요
가끔은 누웠다도 가세요
얼룩진 그늘도 가지고 와서 같이 있다 가세요
오세요
오랜 동안 비어 있는
긴 의자 하나

(장석남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2001)

법정 스님이 머무셨던 불일암에는 스님이 손수 만드신 의자가 놓여 있다.
법정 스님이 머무셨던 불일암에는 스님이 손수 만드신 의자가 놓여 있다.

[감상]
의자에 관한 시를 제법 많은 시인이 썼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정록 시인의 의자가 먼저 떠오릅니다.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이정록, ‘의자’)라는 대목이 공감을 일으키는 시입니다.

의자 하면 떠오르는 것이 또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의자입니다. 법정 스님께서 다듬지 않는 나무와 쓰고 남은 목재로 직접 만든 의자입니다. 법정 스님께서 늘상 앉아서 명상하시고 마당 풍경을 감상하시던 의자입니다.

장석남 시인의 긴 의자는 오랫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새 한 마리 모퉁이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대다 갔습니다. 그리고는 또 그 의자는 오래 비어 있었습니다.

시인은 새가 그 맑은 눈으로 뭘 그리 궁금해했을까 궁금해져서 생각해보다가 ‘이별’에 대해서 참구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내다보았답니다. 그리고는 시인의 노래인지 새의 노래인지 의자의 노래인지가 시 속에서 울려퍼집니다.

“오세요/ 앉았다 가세요/ 가끔은 누웠다도 가세요/ 얼룩진 그늘도 가지고 와서 같이 있다 가세요/ 오세요”

그렇게 많은 ‘긴 의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진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앉았다 가라고 쉬었다 가라고 앉을 자리를 보시하고 있건만 세상에는 은근히 비어 있는 의자가 많습니다.

중앙승가대처럼 비어 있는 ‘긴 의자’가 많은 곳도 없을 겁니다. 우리 스님들의 하루 일정이 벤치에 앉아서 쉴 시간이 많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혹시 앉아 계실 곳이 없거든 경치 좋고 한가한 중앙승가대 ‘긴 의자’에 오셔서 쉬십시오.

의자는 많은 시인에게 유형의 쉼터라기보다는 편안한 의지처를 상징하는 공간인 듯합니다. 내가 의지하고 싶은 의자만 찾지 않고, 내가 누군가의 의지처가 되어주겠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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